-지옥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는 왜 머리가 셋일까.

(...)
-머리가 셋인 동물들은 묘한 불면증에 시달렸을 것 같아. 머리가 하나면 베개만 있어도 잠들겠지. 머리가 둘이면 상대방이 자니까, 나도 자야겠다, 하고 잠들면 되고. 그런데 머리가 셋이면 반드시 제일 늦게 잠드는 머리 하나가 있을 거 아냐? 먼저 잠들어버린 둘에 대한 생각이 사무쳐서 잠을 잘 수가 없지.
(...)
- 셋이라는 건, 결국 모두가 혼자라는 걸 깨닫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수 같아. 밤중에 혼자 깨어 혼자여서 느끼는 외로움은 어린애의 외로움 같은 거야. 둘이 있어도 외롭다면 그건 처참하지만, 완전한 외로움은 아니지. 둘은 어쨌든 가끔이나마 함께 잠들 수 있으니까. 셋이 되어 나머지 둘이 이미 잠들어 있는 걸 보면서 정말로, 정말로 혼자라는 걸 깨달아야 사람은 완전해져.
-재미있지만, 궤변이야.
-그래서 완벽한 거야, 셋은. 삼각형도, 삼각관계도, 삼위일체도, 삼부작도. 그렇지 않아?

"셋을 위한 왈츠", 윤이형, 74페이지



3이라는 오래된 미래

 상영관을 나오며 머리 속에 떠오른 구절이다. 윤이형 작가가 "셋을 위한 왈츠"에서 풀어낸 위의 의견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3은 흥미로운 숫자임이 분명하다. 우리가 지금까지 읽고 보고 경험해온 사랑과 연애의 솔깃한 이야깃거리들 중 많은 것이 '3'과 관련되으니까. 이제는 싫증이 날 법도 한 사랑이야기의 단골인 삼각관계는 그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끊이지 않는 이야기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아직까지도 소설과 영화의 소재로 굳건히 버티고 있는 '3'이라는 숫자의 수수께끼는 명쾌하게 풀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랑이 오래된 만큼 삼각관계도 오래되었을테고 그 만큼 3에 대한 인간의 고민도 오래되지 않았을까.

 <쓰리>의 감독은 삼각관계를 다룰 때 가장 경계해야 할 상투성을 미리 염두에 두고, 한 여자를 사이에 둔 두 남자 혹은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자(물론 이 경우에는 두 여성 간의 묘한 연대감이 싹트는 형태로 발전하기도 한다)라는 이성애 중심적인 기존의 구도를 피해간다. 여-남-남으로 이루어진 이 삼각형 구도에서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중심은 여자가 아니다. 바로 바이섹슈얼 남성 아담이 삼각형의 중심을 점하고 있는 것. 양성애자의 존재를 낯설어하는 이들에게는 꽤나 파격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리 희귀하고 특수한 사례가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양성애자라는 인물로 인하여 기존의 삼각관계가 갖는 구조적 진부함을 비껴나갈 수 있었다는 그 지점이 여기에서는 중요하다.

 

3이라는 완전한 그물망, 그 중심에 있는 아담 

 20년째 동거하고 있는 한나와 시몬에게 일상은 숨을 쉬듯 너무나 자연스럽고, 가끔 보러가는 연극이나 심지어 섹스마저도 그 평범한 일상의 연장일 뿐이다. 중년으로 접어드는 둘의 시간과 추억들은 점점 시큰둥하게 힘을 잃어간다.  

"시몬! 시몬!! 부엌에다가 이 그림 누가 붙여놓은거야?!"
"그거 여기 이사올 때 당신이 붙인거잖아, 한나..(고개를 가로저으며) 난 이만 출근하러 가봐야돼"

 권태와 안정의 경계에서 기우뚱거리는 그들에게 불현듯 나타난 아담은 한나에게는 자극과 열정을, 시몬에게는 '동성애'라는 성정체성의 자각과 해방감을 가져다준다. 이제 한나와 시몬에게 관계의 새로운 공간이 펼쳐진다. 영화 초반에 남자 두명과 여자 한 명으로 이루어진 세 명의 무용수가 서로를 끌어당기기도 하고 밀치기도 하면서 엎치락 뒤치락 추는 춤은 앞으로 이어질 줄거리를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듯 하다. 이제 한나와 시몬, 한나와 아담, 시몬과 아담은 각자의 삶에서 교차되고 홀로 되기도 하면서 서로에게는 보이지 않는 거미줄을 비밀리에 만들어나간다. 기존의 관계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덧붙이는 방식으로. 그리하여 힘을 잃었던 한나와 시몬의 관계도 다시 살아나 생기를 되찾는다. 역설적으로, 새로운 3은 기존의 2를 더욱 공고하게 한다. 태아 복제 관련일을 하는 '아담'은 실질적으로 한나와 시몬 사이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모두의 운명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인도하게 된다.  

 물론 모든 이들이 삼각관계 같은 '다자관계'를 맺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나와 시몬, 아담에게는 이것만큼 완전한 관계는 있을 수 없다. 사랑의 형태가 사람의 머릿수만큼이나 다양하듯이, 관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건 그저 무궁무진한 사랑의 방정식 중 하나일 뿐이다. 단지 이 방정식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개일 수도 있다는 '인정'이면 충분하다. 그러한 관계들에 대한 통찰과 실천들이 받아들여진다면, 이름에서 드러나듯 '아담'같은 신(新)인류가 지금과는 사뭇 다른 곳, 기존의 관습과 통념을 사뿐히 넘어선 곳으로 우리를 이끌지도 모를 일 아닌가.

 위에 인용한 윤이형 소설의 인물이 하는 말처럼, 얽히고 설킨 밀회가 들통났을 때 결국 그들이 내리는 최종적인 선택은, 3이라는 숫자도 완전할 수 있다는 감독의 의도를 대변해준다. 셋 중 한 명이 없어져버리는 제로섬 게임의 결과가 아니라, 관계가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그냥 끌어안는 선택. 터무니 없어 보이는 그 관계를 인정함으로써 그것은 점차 투명해지고 결국 그들은 자유로워진다.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며칠 전 어떤 드라마에서 나온 대사처럼, "소유욕 없는 사랑도 사랑이야?." 하지만 일대일의 관계에서도 결코 상대방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이 질문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그렇다면 서로 부둥켜안은 이들 셋의 앞으로의 미래는? 아마 이후 나올 삼각관계를 다룬 작품들의 몫일 것이다. <쥴 앤 짐>, <글루미 썬데이>, <애프터 미드나잇>등의 작품들이 세개의 점 중 하나의 소실로 끝났다면 <쓰리>는 세 점들의 결합이라는 진전을 보여주지만, 역시 구체적으로 '그 이후'를 그리지는 않는다. 비극 혹은 해피엔딩으로 향하는 이야기 말고, 처음부터 세명으로 시작하는 이야기- 그들 삶 속의 사랑과 해프닝들- 는 찾아보기 어렵다.     



삶이라는 테두리, 그 안의 관계

   영화 초반에 등장했던 롱테이크의 장면을 더듬거려본다. 기차의 창문 너머로 회색빛 하늘을 지나가는 두 줄의 전기줄은 평행선으로 달리다가 간간히 겹쳐지고 다시 떨어져서 각자의 길을 간다. 그리고는 얼마 후 또 만나서 포개졌다가 다시금 헤어진다. 두 전기줄이 만날 때마다 나레이션은 이런 식으로 읖조린다, "균형된 삶... 살아가기" 그리고 또 한 번. "만남과 희열... 살아가기" 그리고 다시 한 번. "정신과 상담, 섹스없는 삶, 권태... 그래도 살아가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 살아가고 살아가다가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감독이 '한 개인의 삶'이라는 보다 넓은 지평에서 관계가 놓이는 위치를 성찰하려 했음을 이 장면을 통해서 짐작하고, 다소 산만한 편집과 몰입을 끊어놓는 장면들이 실은 삶의 분란함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카메라가 꾸준히 잡아내는 일상의 빼곡한 풍경들, 그 속에서 예고 없이 찾아오는 만남과 그로 인해 어지러우면서도 다채로워지는 관계. 그러나 복잡함을 야기하는 그 관계라는 것도 결국 삶이라는 넉넉한 테두리 안에서는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다는 것. 혼란스러운 사랑의 방정식 뒤에 숨어있는 공통분모는 이것이 아닐런지.



    

Posted by 바라의낙타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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