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보내는 숲>,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포스터는 온통 초록의 녹차밭이라니.. 푸르름 속에 빼꼼히 숨어있는 두 사람. 난 이 작품을 보아야만 할 것 같은 '알 수 없는', 그러나 '강한' 생각이 들었다.
뒷심이 강한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거지만 그 마력은 쉬이 표현하기 어렵다. 영화에세이스트 김세윤씨는 이 작품을 '괴력의 97분'이라고 일컬었던데..난 비슷한 의미로서 '파장의 97분'이라고 칭하고 싶다. 서서히 물들어오는 초록의 에너지는 나를 무장해제시켰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때 기어이 울음을 터트렸기 때문이다. 죽음이나 생명이란 주제는 확실히 상투적이다. 하지만 그 상투적인 주제가 되풀이될 수 밖에 없는 건, 이 주제는 '상투적'이지만 '영원한' 인간의 화두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자면 '사랑'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문제는 상투성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의 문제라고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깊이 각인된 상처를 간직한 채 숲에 들어서는 두 사람. 그 둘을 따라들어갔던 나. 카메라는 재촉하지 않고 말 없이 숲 속으로 스 며드는 햇살처럼, 그들을 비춘다. 시게키는 마코를, 마치코는 아들을 떠나보내는 여정은 말이 아닌 마음으로, 각자가 움켜쥐고 있던 상처를 보듬어주는 시간이다. 강물을 건너려는 시게키에게 마치코가 '건너지 말라'고 울부짖는 장면은, '공무도하가'를 떠오르게 한다. 그건 시게키를 향한 절규이기도 하지만, 레테의 강을 넘은 아들에 대한 외침은 아니었을까.
公無渡河 (공무도하)
公竟渡河 (공경도하)
墮河而死 (타하이사)
當奈公何 (당내공하)
저 님아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그예 물을 건너셨네
물에 쓸려 돌아가시니
가신님을 어이할꼬
아들의 손을 놓아버린 마치코의 트라우마는 시게키에 의해서 재생되고 시게키는 마치코에게 조용히 읖조린다.
"강물은 흘러갈 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둘은 숲을 거슬러, 자신들의 추억을 거슬러, 상처를 마주해야만 하는 결정적인 시점이자 장소에 다다른다. 시게키는 고통을 끝낼 시간을 33년간 기다려왔다며 이젠 흙에서 잠들리라 결심하고 마치코는 조그만 뮤직박스의 태엽을 돌리며 사랑하는 이를 보내는 레퀴엠을 연주한다. '보낸다'는 것은 능동적인 행위일 것이다.'잊는다'는 것이 시간에 기대어 수용하는 것이라면, 소중한 이를 '보낸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굳건하게 똬리를 틀고 있어 도저히 끄집어낼 수 없는 그 미련, 기억, 죄책감, 모든 생채기들을 꺼내어서 바람에 날려보내는 것이 아닐런지. 둘은 서로의 손을 잡아주며 "모가리"(사랑하는,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시간 또는 장소)를 비로소 받아들이고 매듭지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