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수 감독의 오랜 팬인 나는 누군가 임상수의 독설에 가까운 직설을 못 참아할 때, 부당하고 불합리한 이 사회에서 굳이 점잖을 뺄 필요가 있냐고 되려 반문하게 된다. 스크린에서 현실의 부조리를 확인하는 건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건 영화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의 잘못이다. 그 비틀린 구조의 일부로서, 영화 속 인물들의 위선에 조소하다가도 뒷맛이 씁쓸해지는 건 동시대인이라는 자각 때문이다.
이번 작품에서 임상수 감독이 견지해온 태도가 빛을 발했다는 건 지나친 표현일까. <돈의 맛>에는 돈의, 돈에 의한, 돈을 위해 돌아가는 한국사회와 그 심장에 있는 재벌의 폐쇄성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1%의 최상류층과 나머지 99%의 일반인들은 같은 한국에 사는 이방인이나 다름없다. 영화는 재벌가의 화려한 풍경을 물릴 정도로 보여주지만 영화평론가 김영진씨의 말처럼 관객이 끝내 다다르게 되는 감정은 공허함이다.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지만 내면은 비어있는 대저택의 빈자들에 대한 연민. 그림자 속에서 부대끼는 빈자들을 보고 있자면 묘한 기시감이 든다. <하녀>의 그 때 그 사람들이 30년 후에 어떻게 되었을지 질문을 한다면, 그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도 있다.
돈 많은 백금옥과 결혼해서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윤회장은 자신의 인생이 모욕이었다고 말한다. 평생 외도로 일관해 온 윤회장의 '양심 고백'에 백금옥은 자기 인생을 물어내라고 울부짖는다. 그나마 인간성을 추구하는 윤회장과 나미, 돈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백여사와 철이 사이에는 주영작이라는 남자가 있다.
<하녀>에서 가진 건 자신의 몸 뿐인 하녀가 스스로를 불태워 재벌가 아이의 뇌리에 무언의 불길로 각인되는 반면 <돈의 맛>에 등장하는 필리핀 출신의 하녀는 '주인'의 사랑을 받지만 살해당한다. 또한 그녀는 본국에 자신의 아이들을 돌보는 또 다른 하녀를 두고 있다. 얽히고 섥힌 이 시대의 위계 서열은 더욱 더 촘촘해졌다. 윤회장과 에바의 관계는 무엇이었을까. 백여사와 주영작이 그들과 다른 건 무엇일까. 주영작과 나미는 윤회장과 백여사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을까. 이들의 관계도를 들여다보면 결국에는 사회적 위치에 따른 관계의 권력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돈의 맛>은 돈이 권력이 되는 이 사회에 대한 영화이자,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재벌가에 대한 영화이자, 재벌가 사람들 안의 또 다른 권력에 의한 영화다.
윤회장과 백여사의 딸 나미는 이렇게 말한다. 엄마가 이 집안의 남자들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이지만 ‘집안의 남성’들과 다를 바 없는 백여사는 감독이 여성성에 대해 어떠한 기대 혹은 희망을 거는지 대변한다. 하지만 나미가 아쉬운 결정적인 이유는 자신이 속한 곳에 대한 회의감과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인 탈주를 감행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그녀는 이혼을 했고, 현실적으로 주변부에 머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나미는 인간적이기는 하나 막연한 낭만주의자에 가까워 보인다. 돈의 미궁을 탈출해서 희생자를 위한 최소한의 윤리적 실천을 하는 주영작과 나미는, 이후 어떠한 삶을 살게 될까. 그녀의 결심이 주영작에 의해 촉발되었다 하더라도, 그에게로 수렴되지는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