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글다운 글을 쓸 수 없었다. 언어가 목과 손끝에 막혀서 도무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언어의 혈이 뚫리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수 밖에. 그러다가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이 영화가 내게로 왔다. 아니, 내가 분미아저씨를 만나러 갔다는 표현이 적당할 듯 하다. 분미아저씨의 부인 '후아이'처럼, 원숭이 귀신이 되어 숲을 유랑하는 아들 '분쏭'처럼.
그들은 왜 분미아저씨를 찾아갔을까. 그 질문을 생각해보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혹은 ‘과학’과 ‘사실’이라고 분류하지 못하는 것들도 ‘인정’해야만 한다. 그렇게 죽은 아내의 유령과 원숭이 귀신인 아들을 받아들이고 난 후, 우리는 그들이 하는 말을 들을 수도 말을 걸 수도 있다.
분미아저씨와 통, 메이가 어둠을 품은 숲을 등 뒤에 두고 둘러앉은 식탁, 죽은 아내 후아이의 유령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그녀 몸의 색깔은 단지 농도가 점점 진해질 뿐이다. 그림자 속 숨어있던 원숭이 귀신 분쏭이 계단을 걸어올라와 마치 놀이공원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인형 같은 모습을 보이면, 비로소 식탁은 인간과 유령, 귀신으로 가득찬다. 3차원적으로만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을 위한 시각적인 친절로 그 모두가 모습을 드러내면 일상적인 그것과 별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그들 간의 대화가 시작된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대하듯 담담하면서도 애틋하게. 물론 ‘그 존재들’을 만난 분미아저씨와 일동의 눈은 순간 휘둥그레지지만, 그건 그저 낯선 대상을 만났을 때의 놀라움에서 크게 지나쳐보이지 않는다. 어둠에서 사물을 더 잘 인식할 수 있는 분쏭에게 사진첩을 보여주기 위해서 식탁불을 꺼주기까지 하니까.
낯선 타자들이 공존하는 네모난 식탁. 그럼 다시 아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죽은 아내와 원숭이 귀신인 분쏭은 왜 분미아저씨를 찾아갔을까. 영화 초반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분미 아저씨는 신장에 병이 있어서 투석을 받고 있다. 영화는 이 장면을 꽤나 많은 시간을 들여서 보여주는데, 내 추측으로는 ‘인간’의 몸을 가진 그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예상되는)은 생을 ‘살아’가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으려고 한 것 같다. 지난하고 고단하지만, 인간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육체의 쇠락을 카메라는 우직하게 바라본다. 분미아저씨는 이제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 앞에 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관대함과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자세. 아마 죽은 아내의 유령과 원숭이 귀신이 되어 숲에서 사는 분쏭은 알았을 것이다. 분미아저씨, 그가 이제는 자신들을 대면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음을.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지점은, 이들이 가족이기 ‘때문에’ 이러한 재회가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이들의 만남이 가족만큼의 밀접한 관계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 구성원 간의 심리적 거리는 물론 천차만별이지만, 적어도 혈연으로 연결된 가족들이 가진 태생적인 밀접함은 가족이 맺고 있는 관계의 부인할 수 없는 한 측면이기도 하다. 혹시 분미아저씨가 죽은 아내와 귀신이 된 아들을 만나는 설정은 우리가 그토록 타자화시키는 인간과 ‘영혼’이라는 존재들이 사실은 이토록 가까운 관계라는걸 말해주려는건 아닐까.
분미아저씨가 기억하는 전생의 모습들은 기이할 정도로 범우주적이다. 분미 아저씨는 자신이 사람을 많이 죽였다면서 스스로의 업보를 이야기한다. 분미아저씨가 ‘예언’하는 장면에서는 원숭이 귀신인 듯한 생물체를 포획한 일군의 군인들이 등장한다. 문명이전과 문명 이후 '자연'에 대한 폭력과 억압이 빈번한 세계에 대한 메타포로도 읽을 수 있는 이 장면들은, 군인들을 많이 죽였다는 분미아저씨의 말과 그의 아들 분쏭의 모습을 연상시키면서 형언할 수 없는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어둠 속으로 몰아내거나 잡아서 없애버린 그 많은 ‘비과학적’이고 ‘야만적’인 존재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마치 그림자처럼 우리들이 미처 의식하지 못하지만 사실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아른거릴지도 모른다. 태국의 민담에서 가지고 왔을, 하지만 제법 보편성을 가진 이러한 모티브들을 전제로 한다면, 이번에 죽은 분미아저씨는 그가 기억해낸 전생들처럼 앞으로 더 많은 생들을 다른 존재로 살아갈 것이다. 그 끝은 알 수 없다. 그저 그는 살아가고 죽고 다시 태어날 것이다.
반복된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는 자연스레 <스카이 크롤러>를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에 대해서 그녀가 쓴 리뷰 에 상당한 공감의 뜻을 보내면서,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짧게 덧붙인다. 난 사실 이 영화를 보면서 오시이 마모루가 인터뷰에서 “젊은 세대에게 친화적이려고 노력”했으며 “대중적이다”라고 밝힌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병기로서의 효용을 위해 죽어도 다시 태어나는 키르도레 자체는 지극히 공상적이지만, 굳이 육체적 죽음이 아니다 하더라도 우리도 유사한 순환의 과정을 겪는다. 24시간을 하루로 정하고 일정하게 시간을 분배해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영화 속의 키르도레처럼 변하지 않는 일상과 비슷한 사람들을 만난다. 요즘 들어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말은, ‘매일매일 사는게 지겹고 똑같다’는 말인데, 내겐 이 말이 스스로에게 내리는 죽음 선고와 다를 바 없어보인다.
칸나미는 “항상 지나는 길이라고 해서 경치가 늘 똑같은 것은 아니(다)”라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그는 반복되는 삶의 어느 순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결코 넘지 못한다고 말리는 ‘티쳐’를 향해 돌진한다. 그가 티쳐를 쓰러뜨리는지 그렇지 못하는지 결과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반복 속에서 행하는 작은 몸부림이라도 의미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작은 변화들을 열망한다는 것. 그 의미는, 마지막에 보이는 구사나기의 은근한 미소에서 알 수 있다. 오시이 마모루는 더할 수 없는 희망의 메시지를 불어넣었다. 고정되어보이는 모든 것 속에서도 변화, 혹은 변화를 추구하는 나의 존재는 빛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