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둘이 말 없이 산을 오른다. 그곳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잡아먹는 괴물 '오거'가 산다는 전설을 가진 아이거 암벽이다. 아무도 오른적 없는 그곳을 최초로 오른다는 불안과 흥분은 변덕스러운 날씨만큼이나 오락가락 교차한다. 한발자국 차이로 생사가 갈리는 산 위에서 사투를 벌이는 남자들, 그리고 망원경으로 그들을 관람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 <노스페이스>는 좁게는 산악에 대한 영화지만 넓게는 스포츠를 둘러싼 산업과 이를 이용하는 국가에 대한 영화로 읽을수도 있다.

 나치가 이끄는 '독일제국'은 아무도 등반을 성공한 적 없는 아이거를 정복하고 이로써 제국의 위상을 드높이고자 한다. 스포츠는 그렇게 교묘하게 정치에 이용된다. 엔딩 후 뜨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합병 운운하는 자막은 생명을 구하기 위함이었던 토니와 앤디의 행동이 어떻게 국가에 의해 왜곡되어 선전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국가에 의한 선동이 가득한 시대적 배경에서 묵묵히 산을 오르는 사람들과 그들 주위로 각기 다른 입장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영화의 큰 축을 이루는 것은 세 부류의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봐왔던 여느 산악영화와 다르게 이 작품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 만큼이나 그들을 둘러싼 바깥세계를 묘사하는데 치중한다. 그것이 내겐 꽤나 흥미로운 지점이었던 것 같다. 





 토니와 앤디가 등반의 희열을 느끼기 위해 산을 오른다면, 오스트리아 팀의 한 남자는 여자들에 둘러싸이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위해 머리가 깨져서 피가 나는 상황에서도 정상에 집착한다. 그런가하면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가혹한 시험장을 쇼를 관람하듯 구경하는 일군의 무리들이 있고, 대중의 호기심에 기대 신문 부수를 늘리기 위해 이를 관망하는 기자도 있다. 이렇듯 '산을 오른다'는 행위는 서로 다른 욕망들을 낳는다. 그 욕망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의 다양한 얼굴과 모습들은 산을 오르는 남자들 사이사이에서 꾸준히 삽입된다. 영화를 따라가면서 감독이 구경꾼만이 아니라 그 속에서 특정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드라마틱한 상황을 좇는 기자들이다.

 기자는 말한다. 난 진짜 드라마는 볼 수 없다. 드라마는 저 산 위에서 일어나는데, 그걸 추측하거나 짐작만 한 채로 이야기를 써내야한다고. 그러한 자조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사를 위해서 철저히 계산적인 사고를 하는데 익숙하다. 등반가들의 생명을 걱정하기 보다는 그들의 성공여부가 기사에 미칠 영향만을 염려하고 이야기꺼리가 안 되겠다 싶으면 가차없이 떠날 준비도 되어있다. 토니와 앤디가 힘겹게 산을 오르는 사이에 한잔 걸치며 편하게 늘어져있고, 그들이 차가운 암벽 사이에서 비박을 하는 사이 따뜻한 레스토랑에서 고급스러운 식사를 한다. 물론 감독은 의도적으로 그들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기자와 언론의 생리를 드러낸다. 

 기자와 비슷한 지점에 있는 또 한 부류는 여흥으로 이 상황을 즐기는 이들이다. 우아하게 모피코트를 걸치고  "흥미진진하다" 를 연발하는 여성은 극적인 상황을 바라보는 대중들, 혹은 우리들을 닮아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등반이라는 행위 자체라기보다는 구경하는 관객으로서 느끼는 스릴이다. 기자와 부인의 태도를 따라가다보면, 목숨을 건 토니와 앤디의 진정성과 아무것도 잃을 것 없는 그들의 얄팍함이 확연히 대비된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한 때의 사건으로 남을 아이거 등반에서, 누군가는 삶을 던져 마지막으로 치열하게 산화(酸化)한다.   





 국가를 위한 휴먼드라마를 생산하는 기자와 오락으로서 소비하는 이들의 머리 위로, 오로지 정상을 위해서 곧게 나아가는 등반가들인 토니와 앤디가 있다. 그들은 눈보라 속을 버티면서도 순수하게 산에 몰입하고 애착을 느끼는 이상적인 인물들이자 누구보다도 자신의 욕망을 주체적으로 실천해나가는 인물들이다. 어쩌면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구경꾼들이나 진짜 드라마를 체험하지 못하는 기자에게는, 혹은 이렇게 끄적거리고 있는 나조차도 가장 부러워하는 존재들일 것이다. 모든 것을 던져 그 모든 것을 잃더라도, 자신의 삶에 솔직한 자들. 
 
 둘의 캐릭터는 영화의 흐름을 부드럽게 할 정도로 적절히 상반되어 있다. 아이거를 정복하겠다는 열정으로 가득찬 앤디를 듬직하게 챙기는 토니와 토니의 의지를 북돋는 앤디. 텐트를 치면서 앤디가 말한다. "우리 꼭 부부 같다." 산에서 공유하는 그들의 감정적 유대는 부부의 그것 못지 않다. 

 그리고 산사나이들의 묵직한 이야기 속에, 위에서 말한 그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인 루이즈가 있다. 표면적으로 그녀는 기자를 따라온 사진기자이지만 토니의 옛 연인이기도 하다. 산에 몰려든 온갖 사람들 중에서 그들을 진심으로 걱정하면서도 자신의 직업적 야심을 포기할 수 없는 그녀는 이들 중 가장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처음부터 그녀의 회상으로 시작해서 그녀의 독백으로 마무리되는데, 마지막 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 죽음이 나를 살렸다" 

 살고 싶다고 절규하는 자의 결말을 미화하는건 당연히 부적절하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잔인한 언론의 세계에 물들어가는 자신을 살린 건 그였다고 생각하는건 무리가 아니다. 그렇게 누군가는 '오르기 위해 오르는' 어찌보면 단순한 행위의 결과가 누군가에게는 삶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놓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인생의 아이러니다. 그것은 루이즈가 직감한 대로 자극적인 뉴스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산악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기자가 직접 경험하지 못해 결핍을 느낀다는 '진짜 드라마'를 영화를 통한 재현으로 최대한 간접 경험할 수 있다. 몇몇 장면들은 손에 땀을 쥐게 하고, 마치 눈보라속에 파묻힌 체험을 직접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우직한 연출은 자연스레 인물들의 감정에 이입할 수 있게 한다. 

 한 가지 더 흥미로웠던 점은 피톤을 박는 뛰어난 음향효과였다. 등반 과정 종종 환청처럼 들리는데, 주인공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고 있는 시점에서 몽환적으로 사용된다. 의식이 서서히 꺼져가는 순간에도 지속적으로 들리는 피톤 소리는 의식의 불이 꺼지고 나서야 완전히 멈춘다. 피톤 소리는 그의 심장 박동 소리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가장 살아있음을 느끼는 곳에서, 죽는다.  





   

  
Posted by 바라의낙타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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