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

글조각들 2010. 6. 4. 15:31



꽃다발을 거꾸로 걸어놓으면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이후로
꽃다발을 받으면 벽에 거꾸로 걸어놓는 습관이 생겼다
거꾸로 걸어놓으면 꽃이 시들어 고개를 숙이는게 안 보이기 때문에
기분상 그렇게 느끼는지 몰라도 
이번에 받은 흰 장미 한다발도 그렇게 해놓았다


시간을 머금고 말라버린 장미들은
눈물처럼 바닥에 꽃잎을 툭툭 떨구었다
문을 열었을 때 그녀가 들고 있던 싱싱한 젊은 장미만큼
부석한 늙은 장미도 아름다워
바닥에 깔린 꽃잎 카펫을 그대로 두었다


누런 종이박스로 어설프게 관을 만든 후
길고양이 시체가 외로워보여 그 옆에 한송이 놓아두니
남은 장미들은 대여섯 송이였다


꽃잎들은 날고 싶어했다
줄기의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니
지구의 중력도 못 견뎌했다


바닥에 흩어진 마른 꽃잎들을 손으로 한 움큼 움켜쥐었다
양손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남아있는 꽃잎들을 더 주워담으려고 손가락을 펴면
쥐고 있던 꽃잎들이 손을 빠져나가버렸다

그래도 양손에 꽃잎들을 모두 담아보려고
꼼지락 손가락을 폈다
바닥의 꽃잎을 겨우 주으면 떨어져버리는 손 안의 꽃잎
내 손으로는 다 담을 수 없다


창문을 열고 손바닥을 활짝 편다
때마침 미풍이 분다
입에서 내뿜는 희뿌연 연기와 함께
꽃잎들이 팔랑팔랑 비행한다

이제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저기 너머 어디에나 속하게 되었다




 

Posted by 바라의낙타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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