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 반 산트의 작품이라면 꼬박꼬박 챙겨보는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날 극장으로 이끈 이는 그가 아니라 하비 밀크였다. 구스 반 산트의 이름을 발견한 건 <밀크>의 포스터에서였으니까. 굳이 순서를 매기자면 이렇다.
 하비 밀크를!
 게다가 구스 반 산트가. 
 게이라는 성정체성과 작품과의 연관성에 관심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단지 그것만이 구스 반 산트의 작품을 찾게 만드는 유일한 요인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왜 하비 밀크를 영화에 담고자 했는지 이번만큼은 명백해보였다. 자신의 정체성이 승리하고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결정적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고자 하는 욕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비 밀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지 않은데다가 그의 생애에 관한 책이나 기사를 읽어본 적도 없었으니 내가 가진 사전 지식이란 그저 하비 밀크가 게이인권운동가라는 사실 하나였다. 하지만 난 그것 하나만으로 영화를 볼 준비가 충분했다. 정치인이 아닌 성소수자들에게 '게이정치인'이라는 타이틀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것일지, 최현숙씨가 선거에 출마했을 때부터 고민해온 터였다. 선거제도에 아무리 냉소적이라고 해도, 대의민주제에서 나의 주된 정체성을 동일하게 가진 타인이 권력을 가졌을 경우, 자신을 대표해주리라 믿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만약 그 정체성이 소수이자 비주류적이라면 대표성에 대해 더욱 절실해질 수 밖에 없다. 벽장 속 어둠에 숨어 있던 성소수자들을 대표해서 벽장을 열고 세상으로 나온 '최초'의 정치인, 하비 밀크. 그래서 영화의 엔딩은 더더욱 눈시울을 붉히게 만든다. 사람들이 거리로 들고 나온 촛불. 비록 그는 암살당했지만 그들이 손에 쥔 촛불 하나하나에 살아있었다. 그는 곧 꺼질 것을 알고도 강렬하게 타올라 어둠을 밝힌 촛불이었다. 



 구스 반 산트는 하비 밀크가 암살당하기 전 극적으로 살았던 8년 간을, 단어 그대로 극적으로 그려낸다. 드라마틱한 흐름은 의도된 연출 같다. 내가 본 실존 인물의 일대기를 좇는 영화들은 대부분, 극적인 요소를 만들어내기 위해 감독이 생각하는 삶의 핵심을 끄집어내고 감동이 될 만한 부분들을 집중적으로 길어올린다. 구스 반 산트 역시 밀크의 삶에서 선택과 집중을 통해 그를 스크린에서 빛나게 한다.

 그러나 감독의 연출 이전에 하비 밀크라는 사람은 이미 드라마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자질을 품고 있지 않았나 싶다. 운동가이자 정치인의 자질 같은 것. 그건 아마도 밀크에게 정치는 생존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밀크의 대사를 통해서도 드러나듯이, 40년 가까이 게이라는 정체성을 숨기고 살았던 그에게 더 이상의 회피는 있을 수 없었다. 애인 스캇과 샌프란시스코에 새로운 터전을 잡은 밀크는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스스로를, 그리고 주변을 속이지 않는 삶이다. 기만하지 않기 위해, 이를 위한 터전을 만들기 위해, 이제 그는 적극적으로 실천한다. 자신의 존재를 사회에 돋을새김하고 절실한 '대표성'을 스스로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수완이나 사익, 혹은 명성을 위한 수단으로 정치를 하는 정치가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게, 밀크에게 정치는 존재론적 문제였다. 그의 진정성은 여기에서 나온다. 물론 밀크의 존재론적 실천은 그를 지탱하고 지지해주는 커뮤니티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밀크의 정치는 곧 그가 사랑하는 수많은 성소수자 친구들의 행복과도 직결된 문제였으니까. 감독은 밀크와 스캇, 잭 등 주변인물들과의 관계 뿐 아니라 그가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게이커뮤니티를 그리는데도 공을 들인다.

 한 가지 재미있는 부분은, 게이커뮤니티에 들어오는 레즈비언 활동가에 대한 게이들의 태도다. "여자를 좋아하다니, 우리로서는 이해가 안 되지만.." 이라니, 후후. 이만큼 간단하게 게이와 레즈비언 커뮤니티 사이의 실질적 거리감을 표현하다니 순간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리뷰에 꼭 쓰고 싶었던 사족)   


 밀크의 '이타심'은 영화 전반에 걸쳐 세심하게 묘사된다. 초기에 밀크가 하는 활동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클리브 존스를 바라보는 안타까운 눈빛과 댄 화이트의 조급함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타인에 대한 연민을 가득 담고 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악마 같은 아니타가 텔레비전에 나와서 말하는 모습을 보는 밀크의 눈빛이었다. 어찌보면 그의 동력은 내재된 분노보다는 안타까움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민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사람들의 분노를 적절한 행동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그는 진정한 운동가(activist)였고, 영화 곳곳에서 이런 모습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세간의 평처럼, 숀 펜은 하비 밀크라는 인물을 무척이나 설득력 있게 형상화한다. 숀 펜에게 의존적인 영화라는 특성이 <밀크>를 생생하게 살아있게 만든다는 사실은, 숀 펜이라는 배우가 가진 힘을 새삼 느끼게 한다. 그가 아니면 누가 하비 밀크를 이토록 흡입력 있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이냐. 




 

Posted by 바라의낙타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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