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현실은 불만투성이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언제나 미래로 미루는 다짐들이 자리 한다. 세계여행을 가야지, 귀농을 해야지, 전원에 주택을 짓고 살아야지, 사회에 환원을 해야지.. 기계로 대체된 사람들은 비슷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역시 비슷비슷한 꿈들을 꾼다. 그러는 동안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 결국 그 꿈의 목록들은 그저 목록으로만 남을 뿐이다. 안타깝게도 이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듯 꿈의 모습만큼이나 닮은 삶을 산다. 그래서 초반 십 여분의 장면들은 주옥같다. 모든 걸 다음으로 유예하는 인간 세상을 압축해서 보여주고 전개될 내용에 자연스럽게 수긍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칼이 포스터처럼 집에 풍선을 달고 여행을 떠나겠구나, 너무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다수가 꿈에 머문다면 소수는 꿈으로 뛰어드는데, 칼은 마침내 그 소수의 반열이 들어간다.


 하지만 <업>에서 여기까지만 이해했다면 그건 한가지의 메시지만 보는 것이다. 부인을 위해 꿈의 여행을 이뤄가는 것이 일종의 껍질이라면 사랑이 떠나간 후에 오는 극심한 상실을 비로소 극복하는 과정은 영화의 알맹이와도 같다. 두 번째 메시지까지 잡았다면 영화를 더욱더 즐길 수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픽사가 만든 ‘나이든 이들을 위한 동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극장을 들어올 때 소란스럽게 떠들며 입장을 알리던 일군의 꼬마 친구들이 엔딩크레딧이 올라간 후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극장을 나간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은 아닐까. 생각보다 영화가 너무 올드해서. 

 몇 십 년 동안 일심동체처럼 살아온 부부가 이별을 겪는 것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크나큰 고통임이 틀림없다. 칼은 재개발이 진행 중인 공사판 한 가운데에서 닫아버린 마음의 문처럼 현관문도 자물쇠로 굳게 걸어 잠그고 산다. 그에게 아내는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녀와의 사별은 곧 세상과의 단절을 뜻한다. 아내는 떠났지만, 자신은 세상에 남았다는 상실감을 감당하지 못하는 칼은 수 만개의 풍선을 달고 외로운 도시를 떠난다.


 하지만 그것은 아내가 간 영원한 여행을 뜻하지는 않는다. 아직은 아니다. 아내가 떠난 세상으로 자신도 가기까지는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과거를 꽁꽁 싸매고만 있지 말고 남아있는 자신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 목록에 적어놓은 낡은 꿈들을 혼자서 실현할 수 있는 힘을 러셀과의 여행이 제공해준 셈이다. 아버지가 없는 러셀과 칼이 결국에는 피가 섞이지 않은 부자지간이나 다름없는 관계가 된다는 설정은 진부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분명 영화는 남아있는 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적인 재미가 좀 떨어지더라도, 러셀이 아니라 칼과 비슷한 또래의 노인이 함께 등장했다면 훨씬 신선하고 의미가 있었겠지만.


 누구나 이별의 아픔을 경험한다. 하지만 충분한 애도의 과정을 겪은 후, 이제는 그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돌려야만 진정한 자신의 삶을 계속 살아갈 수 있다. 집착과 애착은 다르다. 일정한 기간의 집착이 불가피하지만, 애착은 적당한 때에 사랑하는 이를 진정으로 떠나보낼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아내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의 에너지를 더그와 러셀에게 조금씩 향하게 된 칼은 ‘업’의 여행을 통해 자신의 인생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게 되었다.

Posted by 바라의낙타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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