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에도 금방 알아볼 수 있는 유명인 인터뷰어들이 연달아서 말하는 그녀의 이름, "애니 레보비츠”. 오롯이 애니 레보비츠, 그녀의, 그녀에 의한, 그녀를 위한 작품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름은 다소 생소하다. 사진에 대한 지식은 전무하고 그 흔한 DSLR 카메라 한 대 가지고 있지 않은 나로서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롤링 스톤>과 <베니티 페어>의 사진작가로 이름을 떨쳤다고 하니 어디선가 나도 모르게 사진 한 장 정도는 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 잡지<롤링스톤>의 강렬한 표지들은 그녀의 공으로 탄생했으니, 이름은 몰랐으되 분명 사진은 알리라.


 사진가는 이름보다는 사진으로 남고 싶어 하지 않을까란 문외한의 생각을 감히 보탠다. 유한한 존재인 보통의 인간들 역시 어떻게든 자신과 자신이 몸담았던 세계의 흔적을 남기려고 한다. 그 흔적이 마치 자신의 분신이라도 될 수 있을 것이라 여기면서 대리물을 통한 영생을 꿈꾸는지도 모를 일. 방법은 다양하다. 누군가는 자신을 닮은 아이를 낳아서 기를 것이고, 누군가는 역사에 길이 남아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나처럼 글이랍시고 끄적거리고, 누군가는 버젓히 책을 내서 그 앞에 이름 석자를 새길 것이다.


 그렇다면 애니 레보비츠는? 그녀는 사진을 찍었다. 그렇다면 애니 레보비츠의 자매로 예측되는 이 작품의 감독, 바바라 레보비츠는? 애니 레보비츠의 과거와 현재를 뜨개질하다가 애니의 미래마저 관객에게 넌지시 힌트를 건넨다. 실 대신 그녀의 사진들을 촘촘히 엮어서 만들어진 영화는 애니 레보비츠의 삶을 시각적으로 그려냈다. 애니 레보비츠가 처음 사진을 찍기 시작한 시점부터의 연대기적 과정에 초점을 맞춘 영화는 애니의 굵직굵직한 사진사적 사건의 큰 흐름을 일관되게 따라간다. <롤링스톤>의 신출내기 사진작가로 뮤지션들의 르뽀 사진을 찍기 시작할 때부터, 편집장 비아의 영향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연출’이라는 것을 시도하다가 수잔 손택의 권유로 사라예보에서 다시 르뽀 사진을 찍기 되기까지. 이후에는 세 아이의 엄마로, 가족 사진에도 다시 애정을 가지기 시작한다.



 영화는 일견 단순하게 그 과정을 따라가는 듯 보이지만, 과정 사이에는 도표로 정리할 수 없는 그녀 삶의 ‘진짜 이야기들’이 녹아들어가 있다. 애니는 대상의 개성을 끌어낸 과감한 연출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고 그때부터 세계적인 유명 사진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베니티 페어>로 적을 옮기고 이후 본인 스스로 겪었을 딜레마와 함께 일의 열정에 대한 그녀의 인터뷰가 속속 등장한다. 춤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서 이에 몰두했다가 ‘춤은 결국 찍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애니는 끊임없이 가능성을 시험해보지만 한계 또한 인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정은 대상에 대한 한층 더 깊은 긍정을 가능하게 한다. “찍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것인지, 카메라에 함몰되지 않은 그녀는 알고 있다.


 한쪽에 춤에 대한 미적 천착이 있었다면 다른 한 쪽에는 <베니티 페어>같은 소위 말하는 상업 잡지세계가 있었다. 이제껏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패션세계에 입문하는 것이다. 물론 여러 가지 갈등과 고충이 있었지만, 그녀의 사진은 예술적인 것과 상업적인 것 그 어느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를 응시하는 개개인들은 자신의 내밀한 내면을, 때론 당당하게 때론 무심하게 때론 비밀스럽게 그녀에게 관찰 당하고, 포착 당한다. 끊임없이 변해가는 사람을 변하지 않는 카메라로 담아내는 일은 얼마나 가능한 것일까. 사람들은 타인에게 자신의 페르소나만을 허락할 뿐일테니. 그녀는 “아주 일부분” 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중요한건 지금 이 순간을 숨쉬고 있다는 것, 이 말을 덧붙인다.   

 예술과 상업의 기준을 가르는 건 작품이라는 창조물에 기대어서 그걸 어떻게든 구분 짓고 분석하고 재고 따지는 자들의 지적인 허영심에서 비롯된다. 애니는 예술과 상업 사이에 선을 갈라놓아야할 아무런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게 하면서 가뿐히 이러한 경계들을 무화시킨다. 애니가 자신의 색깔을 현실에서 재현해나갈 수 있는 이유는 예술과 상업이라는 이분법적인 도식에 갇혀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건 그저 흘러가는 순간을 담는 행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행위를 통해서 애니의 카메라 앞에 섰던 사람은 물리적인 증거를 남길 수 있다. "아주 작은 일부분"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자신이 살아 숨쉬었을 그 당시의 공기와 햇빛, 하나의 영민한 시선이 만들어낸 ‘삶의 증거물’을. 그렇게 사람들은 누군가의 시선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누군가의 인정으로 자신을 되새기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간다.   


 특히 애니를 통해서 사진 속에 영원히 남겨진 사람이 있다.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피사체는 바로 수잔 손택. 애니와 수잔의 친밀한 유대와 지적, 정서적 교류는 사진에 몰입하는 암실 속의 애니가 성장할 수 있는 '빛' 그 자체였을 것이다. 빛이 있어야 셔텨를 누를 수 있듯이, 애니 레보비츠는 수잔 손택을 통해서 사진에 풍부한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번역에 대해서 한 마디. '순간(혹은 계기, 동기)'을 '모멘트' 라고 하거나 '지지한다(혹은 돕다)'를 '서포트'라고 그대로 자막에 옮겨 놓는 건 도대체 무슨 경우인지 번역자에게 묻고 싶다. 옮기기 애매하거나 도저히 바꿀 표현이 없을 때에는 부득이하게 원어를 그대로 옮겨야하겠지만, 몇 초 안에 '모멘트'나 '서포트'를 머리 속에서 다시 한국어로 바꾸는건 관객의 몫은 아니다. 뭐 그게 전문적인 사진 용어라면 할 말은 없지만.


Posted by 바라의낙타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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