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아스 라인>은 내게 페미니즘과 영화의 매력을 동시에 안겨준 작품이다. 나이 관계상, 나에겐 잊을 수 없는 불멸의 고전이나 다름없다. 예전에는 가부장이 생략된 모계 라인(line)을 이어가는 안토니아와 그 딸들의 인생 궤적, 대안적인 공동체에 시선이 갔다면 이번에 씨네큐브 재개봉에 맞춰가서 봤을때는 계절의 순환에 따른 삶의 변화에도 주목하게 됐다. 

 출산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아이들이 바글바글하고 핏줄 하나 섞이지 않은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식탁은 그 자체로 거대한 생명력을 만들어낸다. 안토니아는 사시사철 농사를 짓는다. 여유로운 웃음을 머급고 밭에 씨를 뿌리고 그 수확으로 자급자족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안토니아의 농장에서 건강하게 자란다. 넝쿨처럼 이어지는 딸들이 낳는 딸들. 모두 안토니아가 펼친 삶의 증거다. 농사를 지어서 수확한 양식을 먹고 자란 그녀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여성의 역사를 써나간다.

 <안토니아 라인>의 백미 중 하나는 식구들이 모두 모여서 식사를 하는 장면이다. 안토니아는 밥을 나누고 관계를 나눈다. 함께 식사를 하는 행위는, 마을사람들이 '성당'이라는 종교적인 공간을 중심으로 설정해놓은 배타적인 울타리에서 소외된 비주류 인물들도 풍성한 삶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안토니아가 받아들여서 이제는 공동체의 일원이 된 사람들은 각자 다르지만, 농사를 짓고 같은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먹는 배경을 공유한다. 이렇게 식탁에 모여있는 장면은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자주 등장한다. 
 


 특히 안토니아가 세상을 떠날 시간이 왔다고 직감하며 식구들을 불러모으고 나서도 '안토니아의 만찬'은 펼쳐진다. 이때는 이미 죽은 이들도 등장하여, 죽음을 앞둔 안토니아의 상태를 비유적으로 드러낸다. 그녀는 잔인한 운명을 온몸으로 맞닥뜨리며 치열한 삶을 살아냈고 마침내 죽음의 경계에 서 있게 된다.

 타인의 죽음은 그녀에게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겪어낸 사계절의 순환, 계속된 변화 속에서 그녀는 사랑하던 이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다. 영화는 인정하든 하지 않든 그것이 인생임을 말한다. 자의든 타의든, 인간은 타인의 죽음을 겪고 시간이 흐른 후 그 상처에는 새살이 돋는다. 때로는 또 다른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따뜻한 공동체를 예찬하는 것 같기만 한 이 영화가 오로지 환상만을 보여주지 않는 이유는 곳곳에 천재지변처럼 닥쳐오는 차가운 인생의 단면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실존적이어서 지극히 현실적인 주제들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콜드 런치>에 비한다면야, <안토니아스 라인>은 따끈따끈하다 못해 뜨거울 것.  

 찬밥이라는 말이 있다. 굳이 사전을 펴보지 않아도 '중요하지 아니한 하찮은 인물이나 사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최고의 성찬으로 여기는 한국적인 전통의 영향인지 식어버린 밥을 먹는 것은 제대로 식사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먹긴 먹지만 온기가 부족한 찬밥. 밥을 먹되 제대로 먹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은 삶을 살되 제대로 산다고 말할 수 없는 처지는 아닐지.

 <콜드 런치>에서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회에서 위태위태하게 살아가며 '찬밥 취급 받는' 인간 군상들이 등장한다. 영화 초반에 사람을 친 상사 대신 운전석에 억지로 앉게 되는 여성은 권력 위계 아래에 위치한다. 상사는 자기 대신 운전석에 앉지 않으면 불이익이 있을거라며 갖은 협박과 회유를 한다. 하지만 크라이스터 입장에서는 상사의 부당한 요구를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들여야하는 이 여성도 돈이 절실한 자기보다는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크라이스터는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성이다. 경제적으로 무능하다는 건, 월세방을 못 내서 친구와 함께 사는 집에서 쫓겨날 처지이고 월급을 가불해달라는 애원을 해야하고 그 애원이 거절당해서 홧김에 직장을 그만두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남성은 한심함의 대명사이다.  

 그렇다면 경제적으로 낫다면 살기가 좀 수월할까? 안타깝게도 이 영화는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하이디를 통해서 보여준다. 하이디는 남편으로부터 소위 '안정적인 연봉'을 받는 전업주부이다. 하지만 하이디는 안정적인 연봉만 받는게 아니다. 바지를 제대로 말라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편으로부터 손찌검도 받는다. 일상적인 언어적인 폭력 또한 마찬가지이다. 아내를 강간하고 때리는 이 남편이라는 작자는 부동산 중개업자인데, 크라이스터가 우연히 만진 메인 퓨즈로 아버지가 죽고 홀홀단신이 된 레니를 쫓아낸다. 


 이 영화는 여러 에피소드들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이렇게 얽혀있는 한 사람의 행동은 다른 사람의 행동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사소한 행동 하나가 파국을 부르는 계기가 된다. 좁게 보면 사람들끼리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넓게 보면 이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다. 굳이 다른 말로 고치차면 운명이라는 단어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차가운 운명의 힘은 사람들의 삶에 점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안토니아스 라인>이 따뜻함이 내재된 공동체에 대한 그림을 그렸다면, <콜드 런치>는 일말의 정도 허락하지 않은채 파편화된 인간들을 그려냈다. 크라이스터는 부엌에 몰래 숨어서 차가운 샌드위치를 눈치봐가며 먹어야하고, 고심해서 고른 비키니를 입고 수영하는 레니에게는 비가 쏟아지니 말이다.     

Posted by 바라의낙타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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