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슨

주연- 오스칼(카레 헤더브란트), 이엘리(리나 레안데르손)

러닝타임- 110분


1. 타인

 성냥갑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아파트 숲 속, 오늘도 누군가는 일상을 지겨워하면서 탈출을 꿈꾼다. 실패를 곱씹으면서 절망의 나락 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반 토막 주식 시장의 개미 주주의 독백 혹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침내 얻은 부부의 행복한 대화가 이어지기도 할테다. 이를 통해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아파트의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위치해 있는지 가늠하게 한다. 이렇게 무수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라는 거대한 울타리. 이 울타리 안의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는 타인이다. 타인이 아닌 사람은 없다. 하지만 타인은 낯설다. 복도에서 지나치는 이웃 사람은 기본적으로 지나가는 개 한 마리와 별 다른 의미가 없다. 이 낯설음은 오스칼과 이엘리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스칼과 이엘리는 그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각자의 생활을 반복하는 서로에게 무의미한 타인들이었다. 그들이 눈이 소복하게 쌓인 정글짐에서 우연한 첫 만남을 가지기 전에는. 루빅스 큐브라는 퍼즐로 가까워지는 둘은 뱀파이어와 뱀파이어의 먹이인 인간이라는 각자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이기에 더욱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의 조건이나 신분과는 무관하게 존재의 알맹이만을 껴안을 수 있는 둘은 스크린을 가득 메우는 스웨덴의 눈처럼 순수하다. 그들은 벽으로 방을 가로막은 타인이었다가, 이제는 모스 부호처럼 그들만의 언어로 벽을 매개체로 똑똑도독, 두드림의 소통을 하는 친구가 된다.

          

2. 초대

 어렷을 적, 친구의 생일파티에 초대 받지 못하면 집에 와서 혼자 몰래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생일파티의 목록을 공들여서 작성했었더랬다. 그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친구들은 얼마나 섭섭해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친한 친구의 생일파티에 누가 누가 초대되는지는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렇게 인간관계를 어림짐작해볼 수 있으니까.


 

 외로운 이엘리가 오스칼에게 호소하는 말은 “날 초대해줘”. 누군가의 호명을 통해서 내가 꽃이 되듯이, 누군가의 초대를 통해서 나는 비로소 그/녀의 벗이 된다. 우리는 그 테두리 안에 소속됨으로써 누군가의 친구라는 인정을 받고 그것은 곧 사회적인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걸 뜻한다. 초대 받고 싶은 욕망, 그것은 단순히 유대를 다지는 의미를 넘어선다.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세계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행위는 상호의 동의 아래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초대’는 나의 세계에 들어와도 된다는 ‘동의’의 동의어가 된다.        


3. 살인

 오스칼은 왕따의 피해에 시달린다. 그는 칼을 들고 나무에 찔러넣으면서 읖조린다. “돼지처럼 소리질러봐. 꽥꽥대봐.” 그 말은 오스칼이 매일 학교에서 듣는 말이다.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학생들을 죽이는 상상으로 하루를 온전히 버틴다. 이엘리가 말하듯, 그는 코니와 그 일당들을 상상으로는 몇 번이나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오스칼의 살인은 상상일뿐, 이엘리의 살인은 현실이다. 그녀는 살기 위해 사람을 죽여서 피를 빨아먹는다. 어떠한 경우에도 생명은 존중해야 한다는 도덕적 잣대를 유보해두고, 욕망과 환상이 실현되는 영화의 기능에 충실해본다면, 이엘리의 살인은 피해를 당하는 입장에서 가해자를 죽이는 환상을 충족시켜준다. 오스칼을 괴롭히는 가해자들을 엄단하는 수영장 장면은 오스칼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순간.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죽여야만 하는 이엘리의 운명은 살인에 대한 도덕적 비난을 다소 누그러뜨려주는 완충 역할을 한다. 피해를 당하는 오스칼과 피를 먹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이엘리는 반대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회에서 소외되어 있는 외톨이라는 면에서 둘은 비슷하다. 빛을 볼 수 없는 이엘리와 밤에 깨어 있는 오스칼은 다른 공간 속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다른 듯 닮은 꼴인 이엘리와 오스칼처럼, <렛 미 인>은 따뜻함과 서늘함이 공존하는 영화다.

Posted by 바라의낙타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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