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연수는 그의 산문집 <청준의 문장들>에 이런 글을 남겼다.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들고양이처럼 잽싸게 흘러가는 시간의 뒤로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는 평생 우리들을 따라다닌다. 누구나 잊을 수 없는 인생의 어느 시절이 있다. 이 영화는 감독에게 '오래도록 그늘을 드리웠던' 유년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독일 치하 프랑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감독은 냉혹했던 그 시절, 보네라는 친구를 만난다. 유태인인 보네는 잠시 수도사들이 운영하는 학교로 피신을 온다. 그 학교의 교장 장은 보네를 비롯하여 목숨의 위협을 받는 페르페, 기리거 등 유태인 학생들을 몰래 숨겨준다. 이교도라고 따돌림을 받는 보네는 감독 자신이기도 한 줄리앙의 바로 옆 침대를 쓰게 된다. 

 영화는 뚜렷한 기승전결 없이, 특별한 클라이막스 없이 풍경화를 그리듯 수도원에서 이런저런 일상을 살아가는 아이들을 그린다. 아이들은 수학 수업과 종교 수업을 듣고 체육 시간에 달리기를 하며 공중 목욕탕에 우르르 목욕을 하러 몰려간다. 

 호기심 반 질투심 반으로 보네를 지켜보던 줄리앙은 보이스카우트 보물찾기를 진행하던 중 아이들과 떨어져 혼자서 보물을 찾게되고, 길을 잃은 보네와 줄리앙은 단 둘이 수도원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게 된다. 헤매던 와중 독일군에 의해 겨우 수도원으로 돌려보내진 그 둘은 그들만의 경험 하나를 갖게 된다. 이때의 광경은 이들의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줄리앙은 우정이라는 보물을 발견했지만, 독일군은 이들의 목덜미를 잡는 것이다.  


 이렇듯 보네와 줄리앙이라는 소년을 중심축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영화는 성장영화의 범주에 넣기에 손색이 없다. 성장영화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요소인 그들만의 우정, 우정으로 인한 추억의 목록들, 추억의 고개를 넘어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찾아오는 변화들이 있다. 보네와 줄리앙은 대놓고 우정을 과시하지 않고 피아노를 함께 치며, 밤에 <아라비안나이트>를 몰래 함께 읽으며 은근한 우정을 다져나간다. 이별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해서, 이들의 이별은 더욱더 애틋하다. 

 이 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요소는 시대의 폭력으로 인한 상처이다. 어머니와 떨어지는 것이 너무나 싫고 밤에 오줌을 싸기도 하는 줄리앙은 혹독한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한다. 나치에게 친구를 보내야만 하는 것. 게슈타포에 의해 발각된 보네는 담담히 말한다. "괜찮아, 어차피 언젠가는 붙잡힐거였어" 하지만 관객의 마음은 괜찮지 않다. 줄리앙 역시 허망한 눈빛으로 그의 손을 짧게 잡은 후 보내주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au revoir'(good-bye), 아이들이 게슈타포에게 붙잡혀가는 장 선생님에게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줄리앙이 보네에게 눈물을 삼키며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굿바이 칠드런>은 단순한 성장영화를 넘어서, 시대에 폭압에 희생되었던 아이들에게 바치는 추모영화이기도 하다.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기전까지 끊임없는 부채의식에 시달렸다고 한다. 자신은 엄혹한 시대에서 살아남았지만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갈 수 밖에 없었던 친구에 대한 부채의식일 것이다. 그 부채의식을 덜기 위한 애절한 노력이 영화를 만든 셈이다. 그 시절의 그림자에 유년시절을 저당잡힌 감독은 말한다. 안녕 아이들아. 유태인들의 처절한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줄리앙은 보네를 보내고 비로소 깨달았을지 모른다. 안녕 아이야. 이제 줄리앙은 밤에 오줌을 싸지 않고 엄마에게 떼쓰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보네를 보내고 자신의 유년시절도 함께 보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바라의낙타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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