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이냐 폴이냐의 논쟁에서 굳이 한 사람만을 택해야한다면 나는 존일 것 같다. 존 레논의 정치적 성향과 그것을 녹여낸 노래들은 분명 나를 끌어당기는 큰 매력임이 분명하지만, 그의 음색에 묻어나는 묘한 슬픔은 내가 그의 노래를 계속 듣게 만드는 또 다른 이유다. 존의 목소리는, 깊은 웅덩이에서 쥐어짜내는 것만 같다. 오래전부터 홈이 파이기 시작했을 그의 여린 마음 속 웅덩이에 가득찬 물기들은 순수하면서도 소금기 가득한 눈물이고, 영화는 바로 이 '웅덩이'에 대해 말한다. 어떻게 해서 이 웅덩이가 생겼는지, 그는 어떻게 이것을 껴안고 살게 되었는지.
 
웅덩이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거기에는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줄리아와 미미라는 두 여인이 자리잡고 있다. 애초부터 감독의 관심은 비틀즈의 탄생과정이 아닌 존 레논의 성장과정이므로, 영화의 제목이 '비틀즈 비긴즈'가 아닌 '존 레논 비긴즈'인 것은 당연하다. 이후 나는 그의 곡들 'jealous man'이나 'Run for your life' 같은 곡에서 드러나는 질투심의 근원과 오노 요코와의 관계에 과거 경험이 미쳤을 영향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추측할 수 있게 되었다. (픽션임을 감안하더라도) 존 레논이 미미와 줄리아 사이에서 느꼈을 혼란과 갈등 그리고 결핍의 감정들을.. 하지만 존 레논에 대한 영화를 보고난 후 줄리아나 미미가 더욱 떠오르는건 흥미로운 일이다. 감독이 여성이라서 유난히 두드러졌을 수도 있겠지만, 보는 내내 나는 존의 시선만큼이나 '두 엄마'들이 존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낳았지만 키우지 못하고 긴 시간을 떨어져 있어야만 했던 엄마와 친자식처럼 키웠지만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결국 상실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엄마, 게다가 그 둘은 극과 극의 성향을 가진, 너무나도 다른 성격의 자매다. 존은 그 둘 사이 어디에도 있지 못했다. 서로 반목하는 엄마들과의 관계에서, 그는 누구의 품에도 진정 속하지 못한 '노웨어보이'였다.

원망하기도 하고 부정하고도 싶었을 그의 아픈 역사가 스크린에 흐르는 동안, 존의 상처만큼 줄리아와 미미의 시린 마음도 너무나 와닿았다. 그래서 나의 머리 속에서 이 영화를 '비틀즈의 주요 맴버 존 레논의 사춘기'로만 분류하기가 망설여진다. 존이 성인이 되어 맺은 관계의 원형이었을 수도 있기에 가지는 상징성이나 '존 레논의 엄마'로서만 가지는 평면성을 넘어서서, 영화는 줄리아와 미미를 입체적인 인물들로 재구성했다. 숨을 불어넣어준 덕분에 그녀들은 '양육에 따른 문제로 고뇌하는 엄마'라는 구체성을 띄게 되었다. 존의 생일에 집에서 혼자 케이크를 준비하고 아들을 기다리는 미미의 쓸쓸한 모습과 아빠 없이 존을 낳았을 때의 막막함을 울며 토로하는 줄리아의 눈물. 이런 것들에 집중하는 지극히 감정적인 정서가 오히려 이 영화를 좋아하게 만들었다. 

세기의 뮤지션 이전에 사랑에 목말라하는 결핍의 인간 존 레논이 있었고, 그의 옆에는 그가 사랑하고 그를 사랑한 줄리아와 미미라는 두 여자가 있었나니. 
  


     
Posted by 바라의낙타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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