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부터 <하얀 리본>은 범인이 누군인가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관객에게 보여주려는 건 범인의 정체가 아니라 사건에 얽힌 마을 사람들의 반응 혹은 그들간의 관계인 것 같다. 사실 정말 중요한 미스테리는 사람들간의 관계다. 산파와 의사의 관계는 처참할 만큼 뒤틀려있고,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의사의 딸은 이상하리만치 순종적이다. 남작과 아내가 불화를 겪는 원인은 알 수 없으며, 아이들의 침묵과 시선은 불가사의하다.
표면적으로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자식에 대한 부모의, 소작농과 고용인에 대한 영주의, 인간의 자유에 대한 개신교 규율의 억압을 퍼즐 맞추듯 드러낸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은 전작에서와 같이 인간의 어두움을 잔인할 정도로 밀어붙인다. 수음의 죄악에 대해 말하며 아들 마르틴을 추궁하는 목사 다음으로 산파를 성적으로 착취하는 의사의 뒷모습이 등장하는 식이다. 유일하게 밝고 평범한, 나레이션의 주인공인 교사도 폭력의 결정체인 전쟁에 징집되어 그가 그토록 소망하던 결혼이 성사되지 못했을거란 암시를 준다.
어른들은 자신들의 그림자를 아이들에게 투사하고 아이들은 그들의 트라우마를 폭력적인 방식으로 표출한다.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는 새를 죽이고 갓난아기인 동생이 폐렴에 걸리도록 한겨울밤에 창문을 열어놓는다. 이러한 억압은 중첩되어있다. 아이들의 동맹에는 장애아 칼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는 누군가에게 시력을 잃는 징벌을 당한다. 그리고 이 중첩된 억압을 은폐하는 마을의 폐쇄성은, 결말에서 프레임 한 가득 담기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서 정점을 찍는다. 이들 모두가 공모자일까.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서 맞닥뜨리게 되는 질문은 과연 이 모든 억압을 '설명' 할 수 있느냐이다. 범인의 정체와 함께 관계의 미스테리도 미궁에 빠진다. 우리는 관찰할 수는 있지만 설명할 수는 없고 그럼으로써 이해나 해결의 가능성도 닫힌다. 차갑다 못해 냉정해보이기까지 한 설원의 등장이 전체적인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이유는 설명의 불가능성을 묵묵한 자연의 풍광을 통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흑백영상에 담긴 눈밭과 들판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지만, 따뜻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미스테리의 해소를 영화를 통해 기대할 수 없어진 순간부터 나는, 숨막힐 듯 이어지는 마을사람들의 불행 가운데 나오는 들판과 설원에게 물어보고 싶어졌다.
그때 그 들판에 내리쬐던 햇살만이, 의사를 넘어뜨린 줄을 묶어둔 나무와 장애아 칼이 버려진 숲속만이 인간이 이토록 잔인한 이유와 모든 재앙의 전말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그들은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미스테리는 눈속에 영영 묻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