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불이 켜진 후에도 우리 둘은 계속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카트린느 브레야의 전작들을 이미 접하고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본 나도 여자들이 벽에 줄줄이 걸려있는 장면에선 '여전히' 경악을 금치 못했고, 그녀는 카트린느 브레야가 처음이라서 오리 목을 따는 장면의 친절한 클로즈업에서는 꽤나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물론 우리는 모두 자매였다. 그래서 오랜만에 만난 그녀에게 <푸른 수염>을 보자고 졸랐지만 나는 그녀에게 감독의 전력에 대해선 함구했다. '카트린느 브레야 작품 답지 않다'는 평을 많이 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림 : 감독이 도축업에 관심이 있는게 아닐까. 오리 잡는 장면에서는 정말 깜놀. 뭐 덕분에 우리가 먹는 통닭구이가 왜 맨날 그 자세인진 이해하게 됐지만.
은: 하하 그런 연유로 통닭의 자세가.. 여자들이 벽에 걸린 장면도 흡사 정육점을 방불케 했어. 바닥에는 피가 흥건하고 모두 나란히 흰옷을 입고 있고. 사람이 아니라 가축, 고기처럼 보이더라니까. 오리 목따는 장면은 엔딩이랑 연결이 되는 거 같고. 그래서 그렇게 카메라를 오래 들이대고 있었나?
림: 몰라. 정말 리얼하다는 것 밖에는..-_-
은: 그렇게 리얼한 장면들이 가장 끔찍한 듯. 투박하면서도 사실적인 묘사였어.
림: 난 마지막에 카트린느가 푸른 수염을 쓰다듬다가 아버지 시신한테 한 것처럼 키스를 할 것만 같더라고. 죽음을 접할 때 묘하게 풍기는 분위기가 있어 보여, 카트린느에게는..
은: 음.. 맞아. 언니 안느와는 다르게 아버지의 죽음을 수용했던 카트린느가 결국 푸른 수염의 죽음 앞에서도 비슷한 태도를 보인게 아닐까. 좀 거창하게 얘기하자면, 안느는 자기를 버린 '아버지' 운운하지만 카트린느는 아버지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잖아. '아버지'의 질서가 무너졌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비교해보는 것도 재밌더라. 근데 안느는 왜 그렇게 돼야만 했는지, 난 그 부분이 이해가 잘 안 돼.
림: 난 그런 생각이 들던데. 아예 존재 자체를 통째로 삭제해버린 것만 같은거야. 자신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대상을 극복하는 방식의 하나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의미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려고 애쓰거나 매달리는게 아니라 그냥 무화시켜버리는거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혹은 그 대상이 내 삶에 있었지만 '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지울 수 있다'라고 보란듯이.
은: 전면적인 부정 같기도.. 혹은 해체?
림: 아님 진짜 괴물한테 잡아먹히는 건지도 모르지.
둘 모두: 크크크크.. (입을 모아) 카트린느 아역으로 나오는 아이 진짜 귀엽고 당돌하더라.
림: 난 카트린느를 보며 어찌나 나같다는 생각이 들던지. 감정이입이 됐어.
은: 응, 넌 그랬을 거 같아. 난 언니의 입장이어서 그런가? 너처럼 카트린느한테 강한 이입은 안 되더라. 감독이 실제로 극중 이름을 카트린느로 한 것도 자신의 지난 경험을 토대로 해서 그랬다고 하더라고. 카트린느가 하는 말 중에 자매 중 동생이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은 대사가 많더라.
림: 그치.. 어려서부터 언니와 방을 함께 썼다고 하며 푸른 수염에게 자기만의 방을 요구하는 거나, 드레스를 맞출 때 이 옷은 물려받지 않은 나만을 위한 옷이라고 하는 거, 언니가 나보다 예쁘다고 말하는 거 등등.(근데 그런 말을 하면서 거울은 본건지.. 훨씬 예쁘더만) 이런 건 세계 공통인가봐.
근데 푸른 수염은 좀 잔인하고 포악할 줄 알았는데 너무 훈훈하더라. '내가 뭘 잘못했니?' 이런 질문을 하다니. 침대 맡의 조그만 강아지 침대 같은 것도 너무 깜찍하지 않냐.
은: 맞아맞아! 의외였어. 함께 버섯따러 다니고ㅎㅎ 미워할 수 없고 동정하게 만드는 남자.
림: 과거가 있는, 상처가 있는 그런 남자.
은: 그래도 결국은 쟁반 위에 올려져서 카트린느의 손에 쓰다듬어지는 신세가 되잖아. 난 그걸 보면서 푸른 수염이 상냥하든 냉정하든 그건 애초부터 이들의 운명에 별 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을거란 생각이 들더라. 결국 푸른 수염은 무력하고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캐릭터지만 죽어야만, 카트린느가 살 수 있으니까. 열쇠를 받자마자 순간 망설이지만 곧 바로 문을 따고 들어가는걸보면 카트린느의 호기심은 주체할 수 없는거고, 그래야할 필요성도 못 느끼잖아. 하지만 호기심을 버리지 않는 건 푸른 수염의 규칙에 어긋나니 이들의 공존은 지속될 수 없는거지.
꼬르륵, 우리의 배꼽시계가 시간을 알려주었다. 밥 먹으러 가라고. 우리는, 당연한 말이지만, 오리 목 따는 장면 따위는 일단 접어두고 푸른 수염과 카트린느가 먹었던 음식들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우리들만의 만찬을 즐기러 갔다. 반주가 빠지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