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는 자란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영화리뷰 2010. 3. 17. 02:32

팀 버튼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면서 엉뚱하게도 '셜로키언'들이 생각났다. 셜록 홈즈와 왓슨을 실존 인물이라 믿으면서 그들의 삶과 행적을 연구하는 셜로키언들에게 홈즈와 왓슨은 현실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나이 들어가는 실존 인물로 인식될 것이다. 그렇다면 셜로키언들에게 셜록 홈즈 시리즈는 더없이 매혹적인 텍스트일터. 상상의 빼어난 형상화로 그간 '팀 버튼 왕국'을 굳건히 세워온 버튼에게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그의 구미를 당기고도 남을 만한 텍스트였을 것이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인 캐릭터들을 선보여온 팀 버튼에게는 어쩌면 단지 '앨리스 나라'에 등장하는 독특한 캐릭터들만으로도.

그는 앨리스의 꿈과 공상에 공감을 했는지, 극중 앨리스의 아버지는 앨리스에게 말한다. "넌 확실히 미쳤어. 근데 비밀 한가지 알려줄까. 모든 멋진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이라는걸". 팀 버튼이 듣고 싶었으리라 예상되는 이 말은 앨리스에게서 다시 '미친' 모자 장수에게 전달된다. 모든 멋진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이라는 것. 광기를 창작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팀 버튼은 앨리스를 통해 스크린 밖으로 말한다. 멋진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이다.

팀 버튼은 자신의 광기를 긍정하면서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소녀로 앨리스를 키운 후, 그녀가 다시 찾게 된 '언더랜드'에서 어떻게 성큼 자라게 되는지 보여준다. 팀 버튼은 셜로키언들이 셜록 홈즈와 왓슨이라는 인물들을 주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가공해가듯, 자신만의 방법으로 앨리스의 성장담을 완성했다. 어쩌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퓨전 혹은 패러디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앨리스의 이야기'는 팀 버튼의 손을 거쳐서 모험 뿐만 아니라 성장까지 담아내는 쾌거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읽어본 대부분의 평들은 <나니아 연대기>를 빼닮은 팀 버튼의 앨리스에게 후한 점수를 주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팀 버튼이 만들어낸 키 큰 앨리스가 좋다.

어떤 리뷰에서는 앨리스가 '페미니즘적'인 캐릭터라고 평했지만, 페미니즘적이라는 말보다는 자율적이거나 독립적인이란 단어가 더 어울리는 느낌이다. 혹은 지나간 페미니즘이라 칭하는게 맞을 것 같다. 평론가 황진미의 말처럼 결국 앨리스의 '환상은 제국주의에 일조'한 것이 된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백인이 아닌 비서구권 여성들도 적극적으로 조명하고 횡단해가는 최근 페미니즘의 추세를 바탕으로 볼 때, '제국주의에 일조하는 페미니즘'이란 지금 이 시대의 페미니즘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흥미를 끈 이유는 앨리스의 캐릭터가 단순히 당돌해서라기 보다는, 앨리스가 스스로 만든 꿈의 세계에서 성장해가는 모습을 팀 버튼표 영화에서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팀빠'라는 사실을 숨길 의도는 전혀 없다:)

팀 버튼의 재해석을 나의 관심사로 재해석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붉은 여왕과 하얀 여왕이라는 캐릭터이다. 마치 앨리스 내면에 자리한 두 얼굴처럼, 양가적인 앨리스의 욕망을 대변한다. 권력을 중시하는 붉은 여왕은 귀족과 결혼을 하여 귀족의 신분을 얻고자하는 앨리스 언니와 엄마의 바람이 투사되어 자리잡았다. 붉은 여왕의 대두와 폭력성은 과장되어 표현되는데, 앨리스가 체제순응적인 가치관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표면적으로 앨리스는 언니와 엄마의 가치관을 거부하지만 암암리에 스며든 가치관은 상당히 강하게 그녀 내부에 자리잡아있고, 아직 그것을 단호하게 거부할 정도로 내면적인 힘이 생긴 상태는 아니다. 하얀 여왕은 자연을 사랑하고 부드러운 심성을 가진 인물로 붉은 여왕과는 대조적이다. 앨리스가 스스로 결정을 내리도록 독려하는 등 그녀를 응원하는 너그러운 모습은 그녀가 따랐던 아버지를 떠오르게 한다.

앨리스는 같은 꿈을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꾼다. 저명한 꿈 전문가인 제레미 테일러는 반복해서 꾸는 꿈은 꿈꾼 사람이 지닌 삶의 기본적인 이슈들을 선명하고 강렬하게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꿈들에는 많은 의미가 미묘하고 다층적으로 뒤섞여 있다. 그리고 외부 환경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개인의 삶에 의미를 주는 기본적이고 상징적인 '이야기'인 이런 꿈들은 삶의 기본적인 행동과 결정에 끊임없이 울림을 준다. 그녀가 살아가면서 맞닥뜨려야만 하는 현안들을 앨리스가 반복적으로 꿨던 꿈들이 계속해서 알려준 셈이다. 그리고 마침내, 앨리스는 오로지 자기의 힘으로, 성장을 위한 '도약'을 해낸다.

결국 불가능해보였던 '재비워키'라는 장애물을 쓰러뜨리고 그녀는 부쩍 자란다. 엡솔럼은 고치에서 나비로 환생하고, 앨리스는 피곤한 아이에서 성숙한 성인으로 성장한다. 엡솔럼이 "난 이번 생은 다 살았거든"이라고 말하며 스스로 뜨개질을 해서 누에고치가 되는 장면은 무척이나 인상적인데, 이 장면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소녀기의 갈등을 해결한 앨리스는 다시 원더랜드에 갈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아마도 그러지는 못할 것 같다. 앨리스가 다시 온다고 하자, 미친 모자 장수가 다시 올리 없다고 대답한 것처럼, 이제 앨리스는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할테니. 이번 생의 고치를 벗고 다음 생을 준비하는 엡솔럼처럼, 앨리스도 이제는 또 다른 '원더'랜드를 찾게 될 것이다.

프로이트와 융의 동료이기도 한 헝가리의 정신분석학자 샌도르 페렌치는 '꿈 자체가 진화의 작업장'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꿈은 늘 꿈을 꾸는 사람이 발전하고 지향하는 까닭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 견해에 따른다면, 앨리스가 '나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으로 성숙해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언더랜드 꿈'을 통해 스스로 답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매력적인 설정들에도 불구하고 캐릭터들이 다소 심심하다는 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일부러 자기색을 뺀 것일 수도 있지만, 팀 버튼표 캐릭터들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겨울잠 쥐(너무 디즈니스러웠다)나 시계 든 토끼는 지나치게 평범해서 밋밋해보일 지경이었다. 붉은 여왕에 비해 하얀 여왕은 성격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얌전했다. 붉은 여왕의 대두나 미친 모자 장수의 머리카락을 제외하고, 다른 캐릭터들을 팀 버튼식으로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마지막에 쌍둥이 자매를 보며 '내 꿈의 쌍둥이를 연상시켜'라고 관객에게 가르쳐주는 부분도 지나치게 직접적이어서 유추해보는 재미를 반감시키는 부분이다. 때론 과도한 친절은 영화적인 재미를 떨어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