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성의 관계는 어떠할 것이라 예상하는가? 보통은 머리카락 잡고 뒹굴거나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복수를 다짐하는 모습을 우리는 상상한다. '남편의 애인을 만나다'라는 카피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영화 역시 불륜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그리고 불륜이라고 하면 복수와 치정이 얽혀있는 치정극이 머리에 떠오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가 무슨무슨 유혹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드라마를 보면서 즐기는 막무가내 복수극은 적어도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아니다. 물론 남편의 외도를 눈치챈 사라 역시 내면 깊숙히 남편의 애인에 대한 증오를 간직한채 그녀를 만난다. 하지만 예상 가능한 범위를 멀찍이 피해가는 이 스릴러는 눈덮인 거리가 시시때때로 나타나는 핀란드의 차가운 거리만큼 냉정하게 두 여인의 심리를 따라간다.

 
 사람의 감정이 단순하기만 하다면 살아가면서 고뇌할 일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뼛속 깊이 증오하면 내가 떠나면 되고 죽을만큼 사랑한다면 함께 있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이다 싶다가도 도무지 나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고, 자신을 속이고 배신한 걸 알면서도 매정하게 내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감정이다. 나를 불행하게 만든 그 사람을 나와 같이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싶어도 차마 그러할 수는 없는 것.



가면

 사라는 유능한 산부인과 의사이다. 남편이 외도를 한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적어도 표면상으로 그녀의 삶은 안온해 보인다. 하지만 남편의 애인 툴리를 만나면서 그녀의 잔잔한 생활은 무너지기 쉬운 얼음장이었음이 드러난다. 사라는 이 모든 파탄의 주범인 툴리에게 정체를 숨기기 위해 크리스타라는 가명의 가면을 쓰고 접근한다. 하지만 가면은 어느새 그녀의 또 다른 자아가 되어버린다. 결혼생활을 망친 툴리는 크리스타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되고 사라는 레오의 아내로서 툴리를 증오하지만, 툴리의 친구로서 그녀에게 애정을 느낀다.


 의사이자 능력 있는 남편을 둔 사라는 가부장적 일부일처제에서 전형적으로 우위에 있는 여성이다. 이에 대한 숨겨진 부채감이 있는지, 그녀는 악에 차서 스스로에게 내뱉는다. '너 같은 여성을 잘 알아. 부르주아 엘리트'. 크리스타로 위장하는 사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향한 외부의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부르주아 엘리트를 혐오하는 자신 내부의 해묵은 음성.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증오의 화살을 자신에게로 돌리기도 한다. 그 순간 그녀는 지금까지의 문제 없던 자신의 삶에 균열을 낸다. 그 전까지 그녀는 흠잡을데 없는 아내라는 가면을 완벽하게 쓰고 있었다. 이제 사라는 그 역할에 혼란을 느낀다. 이미 둘 사이에 신뢰는 깨어진지 오래이고 사라는 남편을 여전히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관계에 대해서 어찌해야할지 갈등한다.


연대


 갈등하는 사이 툴리와의 인간적인 관계는 점점 깊어진다. 그들은 멋대로 여성들 사이를 넘나들며 편의대로 그녀들을 자신의 감정적 상대로 이용하는 레오를 소외시킨다. 처음에는 자신을 소외시킨 레오와 툴리의 관계를 엿보기 위해 툴리에게 간 사라이지만 툴리와 사라는 이제 레오가 없이도 애틋한 관계이다. 물론 그 둘의 관계는 레오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게다가 사라는 툴리를 속이면서 레오가 사라를 속인 것처럼 상처를 준다. 하지만 레오라는 끈으로 가까워진 둘의 관계는 독특한 색을 가지게 된다.

 그들의 관계를 연대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적어도 레오가 벌려놓은 상처 가득한 관계에서 그들은 살아남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레오는 어쩌면 하나의 상징에 불과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툴리에게 레오는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연인이 아니었을 것이고, 사라에게 레오는 언제든 자신을 속이기 쉬운 남편이었을테니까. 툴리와 사라는 겉보기에는 서로를 미워해야하는 라이벌이지만, 실상 얼음장 같은 차가움 속에도 미처 알지 못한 따뜻함이 숨어져있는 법이다. 그리고 이 두 여성은 그 온기를 배신하지 않는다.


Posted by 바라의낙타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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