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영국을 배경으로 한 두편의 영화 <자유로운 세계>와 <이스턴 프라미스>를 보았다. <자유로운 세계(원제: it's a free world)>는 켄 로치 감독의 최근작, <이스턴 프라미스>는 <폭력의 역사> 등을 만든 바 있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21세기 불후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전혀 다른 색깔을 가진 두 작품은 묘하게도 모두 영국을 배경으로 이주노동자들을 다뤘다.
물론 <이스턴 프라미스>는 보리 V 자콘파의 조직 내의 암투와 이 모든 비밀을 담고 있는 한 권의 일기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에 중점을 두고 있고 <자유로운 세계>는 영국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는 점에서 매우 다르다. 하지만 유럽연합으로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이주노동자들이 사회문제로까지 인식되고 있는 요즘, 이 영화들에서 보여주는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은 자못 시사적이다. 우리나라 역시 이주노동자들이 코리안 드림을 갖고 찾는 다문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점에서, 이 영화에서 보이는 여러 모습들이 그리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1. 우리가 사는 자유로운 세계?
<자유로운 세계>의 주인공 앤지는 이주도동자 직업소개소의 계약직 사원이다. 하지만 상사의 성희롱에 반발했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잘린 후 친구 로즈와 자신이 직접 직업소개소를 차리게 된다. 앤지는 자신이 이주노동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점점 의도치 않게 노동자들은 착취하는 '사장'이 되어간다.
앤지 역시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돈을 위해 돈을 쓰고 이를 위해 노동자들의 돈을 떼어먹게 된다. 사무실을 차릴때까지만, 안정을 찾을때까지만, 이번에만.. 끊임없이 다음을 기약하며 그녀는 자신을 해고했던 직업소개소의 사장과 별반 다를바가 없어진다.
앤지는 사장이지만 싱글맘이라는 중첩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24살에 퇴직하여 집에서 TV나 보는 전 남편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고 부모님에게 맡긴 아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싱글맘으로서 억척스럽게 살아야만 한다. 그렇기에 친구 로즈가 '넌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지?' 라며 황망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볼 때 그녀는 이를 앙다물고 속으로 그렇노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을 위한 착취는 불가피하다.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다정한 공생은 공상일 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성품이 행동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계급이나 위치가 행동을 만드는 것이다. 앤지는 억울하게 해고를 당했던 그 때의 앤지가 더 이상 아니다. 이는 그녀의 성품이 갑자기 악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거리를 알선해주는 '사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사무실을 차리고 돈을 벌어서 자유롭게 살 수 있을거라 믿었건만,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도, 녹록지도 않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주술에 걸려서 살아간다. 자신의 능력만큼 일하고 그만큼 돈을 버는 자본주의 사회는 자유롭고 공평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이러한 사탕발림은 이주노동자들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탄로나 버린다. 일자리를 찾아 '자유로운 세계'로 건너왔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임금체불, 산재, 불안정한 일자리, 열악한 노동환경이다. 능력만큼 일해서 일한만큼 받고 싶어도 일용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자들과는 처음부터 다른 출발선에서 아무런 이유없이 반토막의 임금을 감수해야한다.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은 일용직이나 계약직으로 밖에 일할 수 없다.
매일노동뉴스 12월 24일자에 따르면 동유럽지역과 다른 나라의 이주노동자들은 주로 저임금·비정규직 일자리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자국에서 일자리를 구할 때보다 구직 기회가 현저히 낮은 것이 현실이다. 보건청에 따르면 이주노동자들은 주로 단순반복작업·장시간노동·저임금과 주야간 교대 근무등에 투입되는 경우가 자국노동자보다 많았다. 특히 유색인종 이주노동자의 경우 작업장에서 폭력과 인종차별에 시달리는 빈도가 높아 스트레스와 과로 발생비율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감독은 영국의 이러한 현실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주노동자들을 조명한다. 결국 자국의 일자리가 부족해 자본의 이동에 따라 노동을 이동해온 동유럽지역의 이주노동자들이 맞닥뜨리는 냉정한 현실은 앤지의 악덕함 때문이 아니다. 노동자들을 효율적으로 착취해야만 살 수 있는 자본주의의 진화판 신자유주의라는 구조 때문이다. 중첩된 정체성을 가진 앤지 역시 이 구조의 희생자이자 가해자이다. 아들과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앤지의 소박한 소망이 낳은 행위들은 이 구조적인 오염으로 변질되어버린다. 우리가 자유롭다고 찬양해 마지않는 이 사회가, 전 세계가 사실은 자유로움을 위장한 부조리의 세계임을, 감독은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2. 암울한 영국의 뒷골목길, 짓이겨진 여성의 인권
앞서 언급한 영국의 상황보다 더 암울하고 음침한 영국의 뒷골목, 그곳에서 <이스턴 프라미스>는 시작된다. 피가 튀기는 잔인한 첫장면으로 대서사시의 서막을 알리는 영화는 보리 V 자콘파의 행태를 낱낱이 적은 어느 여성의 일기가 발견되면서 서서히 전개된다. 그 여성은 보리 V 자콘파의 두목의 아이를 임신한채 거리를 떠돌다가 아이를 낳은 채 그만 죽고 만다. 그 여성은 보리 V 자콘파가 영국에 '공급'하는 여성들 중 한명이었던 것이다. 그 일기를 손에 넣은 조산원 안나는 일기에 적힌 식당을 찾아가고 이 사건에 연루된다.
영화는 표면적으로 보리 V 자콘파라는 조직과 이 조직의 두목과 아들, 그리고 그의 친구가 권력을 놓고 싸우는 전형적인 <대부> 스타일의 갱스터 영화이다. 21세기 불후의 걸작이라는 영화사의 홍보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갈만큼 짜임새는 탄탄하고 캐릭터는 개성이 있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영화에서 설핏 내비치는 여성의 인권, 위의 사진 뒤에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동유럽에서 건너온 여성들의 현주소이다. 14세 여성의 일기에는 '우리 아버지는 광부였다. 탄광이 무너져서 돌아가신 아버지는 죽을 때 이미 땅 속에 묻혀있었던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시베리아를 건너 이곳으로 왔다.'라고 담담하게 적혀있다. 그렇지만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은 처참하게 짓밟힌다. 그녀는 일자리를 얻어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지만, 그녀의 선택지는 별로 많지 않다. 보리 V 자콘 파의 손아귀 안에서 성매매 시장에 유입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강유원의 서평집 <책>에 따르면 '영국은 지금 유럽 15개국 가운데 삶의 질이 13위에 머물고, 국민소득은 프랑스가 2만 5천 달러인데 비하여 고작 1만 8천 달러에 그치고 있다. 이것이 유럽 대륙의 복지주의와 대비되는, 오늘날 영국 보수주의가 처한 극단적인 부익부 빈익빈의 현실이다.' 이는 보수주의 주장에 따라 국가정책을 운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이 대안적인 삶터라고 생각하는 영국도 사실은 절대적인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곳인 것이다.
무엇 때문에 오늘날의 영국이 탄생했고 왜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오느냐에 상관없이 지금도 무수히 많은 동유럽권 국가의 사람들은 영국으로, 서부 유럽으로 이주해오고 있다. 남성들이 저임금과 계약직의 열악한 조건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다면 '성이 자원'일 수 밖에 없는 여성들은 각종 성매매에 종사하게 된다. 빈곤에 시달리다 못해 유럽연합에서 물질적으로 부유하다고 알려진 국가에 올 수 밖에 없는 이들은 그러나 이곳에서도 더 나은 삶은 커녕 각종 폭력에 시달리고 마약에 찌들어 병들어간다. 정신적으로 황폐할대로 황폐해진 여성들의 모습은 주요하지는 않지만 영화에 직접적,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영화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지는 않는다. 니콜라이와 안나의 로맨스로 이목이 집중되기에 14살 러시아 여성이 쓴 눈물의 일기는 잊혀지지만, 난 앤딩크레딧이 올라오고 극장을 나올 때까지 그 여성의 독백을 잊을 수 없었다.
오늘날 한국의 모습을 반추해본다. 러시아 여성의 빈곤화와 이에 따른 이주는 영국만이 아닌 한국에서도 진행 중이다. 많은 러시아 여성들은 세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성매매 시장에서 '금발미녀'로 둔갑해서 한국남성들에게 성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들의 처우는 둘째치더라도 그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다. 오늘도 영국이나 한국의 음침한 뒷골목 어딘가에서 우울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볼 그녀들이 쓰는 일기도 어딘가에 묻혀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