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글을 써보겠다는 마음을 먹은 지 몇 달이 지났다. 첫 문장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뜻대로 잡히지 않았다. 부러 멀리 심어놓은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쓴다는 행위 자체보다도 머잖아 쓰겠다는 결심에 따라오는 의지의 단호함에 기댔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쓰지 않더라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왠지 안심이 들었다. 그렇게 시작을 유예하면서, 일과 일상에서 언젠가 옮겨갈 수 있는 순수한 영토를 하나 마련해놓은 셈이었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좋아하는 이유를 한 두 가지로만 추릴 수는 없다. 다만 마지막 세 번째로 보았을 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부분에 관해 말할 순 있다. 바로 퓨리오사의 유토피아다. 훗날 녹색의 땅, 어머니의 땅으로 가겠다는 희망은 퓨리오사를 버티게 한 힘이었다. 이 힘은 시타델의 고된 생활을 지탱해주고, 임모탄의 부인들을 데리고 탈출을 감행하게 한 원동력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목적성 없는 글을 쓰겠다는 기대가 나의 일상에서 작은 위안이 된 것처럼 말이다. 글의 자리에는 여행, 귀향, 퇴사 등등 어떤 것도 올 수 있다.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면서도 현실 너머를 끊임없이 바라보기 마련이니까. 문득 한강의 단편 소설 '훈자'의 이 대목이 떠올랐다. 


 오랜 시간 계속되어온 습관이었으므로, 그 여자는 훈자를 생각하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여자가 생각하고 싶은 것은 훈자가 아닌 훈자였다.

 훈자가 아닌 훈자를 생각하는 일은 훈자인 훈자를 생각하는 일보다 힘이 들거나 거의 불가능했다.

 그 여자의 훈자는 더 이상 영문판 <론리 플래닛> 파키스탄 편에 있지 않았고, 그 여자가 암호를 걸어놓은 파일에 담긴 신장 지방과 파키스탄 지도에 있지 않았다. 검색창에 훈자, 라고 써넣으면 떠오르는 블로그들, 카페들에 있지 않았다. 길고 복잡한 화장품의 이름, 깎은 듯 아름다운 여배우의 옆얼굴에 있지 않았다.      - <노랑무늬영원> 중 '훈자', 48쪽 

 

 현실 너머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곳을 꿈꾸는 주체를 현실에 붙들어주는 역설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동경으로 실천을 대리만족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유토피아는 유토피아 자체로 유지된다. 이와 다르게 원래의 형상에서 변모를 거듭하기도 한다. 소설 속의 여자에게 훈자는 더는 파키스탄의 훈자라는 지역이 아니지만, 훈자가 아닌 훈자를 생각하며, 현실의 절망을 버텨낸다. 우리의 유토피아는 유토피아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유토피아가 아닌 유토피아가 된다. 그리고 최초의 모습에서 달라졌든 유토피아는 빛을 잃지 않는다.


 퓨리오사는 안주 대신 탈주를 택한다. 이상향을 머리로 그리는 데에서 나아가 그곳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날이 오기까지 얼마나 숱한 고민의 밤을 보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많은 감정을 깊은 표정 뒤에 숨긴 채 핸들을 잡는다. 녹색의 땅이 부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모래언덕 위에서 울부짖는 퓨리오사의 뒷모습으로 비통함을 다만 짐작해볼 따름이다. 유토피아를 상실한 자가 무릎을 꺾는 광경을 보는 게 쓰라린 까닭은 누구나 유사한 노스탤지어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퓨리오사와 달리 대부분 유토피아를 찾아나서는 대신, 마음 깊은 곳에 품으며 현실을 살아낼 뿐.


 퓨리오사의 좌절은 안타깝지만 그다지 예외적인 일은 아니다. 유토피아는 애초부터 좌절의 씨앗을 가지고 있으니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유토피아의 본질이므로, 이를 실현하려고 할 때 현실과 이상은 불협화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유토피아의 어원은 'ou'(없다), 'topos'(장소)로, '불가능한 줄 알지만 끊임없이 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구체적 대안은 아니되 대안의 밑그림이 될 수는 있다. 새로운 세계를 그릴 수 있는 밑그림이자 더 나은 곳으로 향하게 하는 지도.


 그러나 유토피아가 불가능하다고 꿈조차 꾸지 않는다면 변화의 싹은 영영 틀 수 없을 것이다. 예술, 사상, 종교를 추동하는 동력도 생기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핵심은 유토피아가 실제로 가능한지 아닌지보다, 대안을 추구하면서 얻는 에너지와 그 과정에서 맞는 예상 밖의 국면이 아닐는지. 도착지로 가는 길 위에서 때때로 생각치도 못한 경험을 겪으며 의외의 지혜를 얻지 않는가. 모든 것을 목적으로 환원하기보다 과정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더욱 다양한 가능성이 눈앞에 펼쳐질 수 있다.


 퓨리오사가 다시 시타델로 돌아가는 장면은, 유토피아를 향하는 여로에서 디스토피아를 바꾸겠다는 의지를 얻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의미심장해진다. 퓨리오사는 녹색의 땅을 잃었기에 그들만의 유토피아에 머무르지 않고, 도리어 시타델로 돌아가 많은 이들을 구할 수 있었다. 개인적 상실은 사회적 구원의 계기가 되었다. 저기가 아닌 이곳에 발을 딛고 서겠다는 마음은 유토피아를 좇기만 하는 것보다 훨씬 단단하다고 믿는다.






Posted by 바라의낙타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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