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쁜 것들 다 묻어버리고 싶어!’
공효진의 발갛게 물든 볼과 앙다문 입술은 <미쓰 홍당무>의 줄거리를 십분의 일쯤은 예측하게 했다. 하지만 오히려 줄거리의 투명성은 영화를 보고 싶다는 동기를 무엇보다도 강렬하게 유발했다. 무엇이었을까. 나를 잡아끌었던 공효진의 힘은. 생각해보니 양미숙(공효진 분)과 나의 어떤 행동은 상당히 닮아있었다.
극중 양미숙은 영화 내내 삽질을 한다. 세상의 잘난 것들을 모두 땅에 묻어버리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진짜 삽을 들고 흙을 퍼내는 미숙씨는 두 가지 ‘삽질’을 모두 하고야 만다. 끊임없이 땅을 파내고 허튼 계략을 꾸미는 그녀의 목표는 오직 하나. 그녀가 사랑하는 서 선생님과 사모님의 이혼을 막는 것. 왜냐하면 그것은 곧 그가 증오하는 동료 이유리 교사와의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역시 부모님의 이혼을 막으려는 서 선생님의 딸, 서종희가 의기투합 합세한다. 다른 의도, 같은 목표로 뭉친 이들은 잔머리를 굴리며 유리 교사와 서 교사의 앞길을 막아서려 안달복달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계속되는 삽질만이 있을 뿐이다.
1. 나도 알아, 내가 별로라는 거!
얼마 전 아는 지인이 XX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리 가깝진 않았지만 그의 글 솜씨를 남몰래 부러워하던 나는 그 소식을 접하자마자 인터넷을 통해 그의 글을 탐독했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수상장면을 담은 동영상까지 입수했다. 난 그 동영상을 보고 또 보며 시기와 열등감으로 얼룩진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글의 빼어난 문장력과 짜임새를 보고,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불편한 마음으로 그의 당선을 웃으며 축하하는 수 밖에.
세상에는 몇몇 행운아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재능만큼 그렇지 못한 다수를 절망의 나락에 빠뜨린다. 절대 그들의 탓은 아니다. 자기 비하와 비교로 엄청난 시간을 쏟아 붓는 나 같은 ‘몇몇’이 가진 망할 놈의 컴플렉스 때문이지. 양미숙의 어록 중 하나는, “세상이 공평하단 기대를 버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남들보다 몇 배는 열심히 살아야 해”. 그녀는 고등학교 때의 왕따와 현재의 전따(전교 따돌림), 안면홍조증, 전망 없는 짝사랑으로 힘겨운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그리고 말한다. 1등에 목매느니 차라리 목을 매겠다, 라고. 오기로 뭉친 이 말은 그녀가 가진 아이러니를 대변해준다. 2등을 기억하라, ‘memento second’라고 절규하면서도 잘난 그 사람이 자꾸만 신경쓰이고 집착하게 되는 것. 그래서 그 사람 같아지고 싶은 마음을 포기할 수 없는 것.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을, 자기는 별로인 채로 세상에 우뚝 서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을 스스로 아는 것. 여기에 양미숙의 너무나 솔직한 인간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내가 느끼는 동질성이 있었다.
매슬로우는 욕구-위계론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많은 욕구를 가지고 있고, 또 그 욕구들로 움직이는 존재인지 말했었다. 가장 낮은 욕구인 생리적 욕구부터 고차원적인 자기실현의 욕구까지, 인간은 그 사이사이에도 안전의 욕구, 소속·사랑의 욕구 등을 갖는다. 양미숙은 고등학교 때 극단적인 왕따를 당하면서 비록 선생으로서의 의무지만 자신을 따뜻하게 불러준 서 선생으로부터 강한 사랑에의 욕구를 느꼈을 것이다. 나는 신춘문예에 당선된 그 지인을 보면서 외부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결핍된 욕구가 끊임없이 나의 컴플렉스를 재생산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받거나 인정받고 싶지만 자신이 별로라는 것을 알기에, 끊임없이 이를 위해 몸부림치는 인간의 모습은 그리 낮설지 않다. 우리는 스스로가 별로라는걸 알지만, 자신을 버릴 수 없어서 혹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 욕망을 단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욕망은 때론 삶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니까. 해서 양미숙은 홍당무 같은 얼굴로 내지른다. “나도 알아, 내가 별로라는거!”. (그리고 나도 안다. XX일보 신춘문예는 커녕 XX대학 문학상에도 떨어진, 내 글이 별로라는거!) 그리고 별로라는걸 알면서도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2. 전체성의 폭력, 왕따
잠깐 이야기를 돌려서, 영화의 배경을 살펴보자. 무기력한 왕따라는 면에서, 서종희와 양미숙은 닮은꼴이다. 그들은 울부짖고 찡그리고 바락바락 대들지만 전체의 그 무서운 힘으로부터는 보잘 것 없이 내쳐진다. 양미숙은 고등학교 졸업 앨범을 찍는 자리에서 어디에든 끼려다가 손에 손을 맞잡은 반 아이들의 굳건한 팔목 스크럼으로부터 내팽겨진다. 서종희는 선생님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니면 모두가 리본을 목에 거는걸 yes라고 할 때 no라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반뿐만 아니라 전교생의 무시를 받는 전따가 되어버린다. 양미숙의 트라우마는 서 선생님에 대한 집착으로 회생하고 서종희의 트라우마는 양미숙을 통해 재현된다. 공모한 집단은 너무나 천진하게 웃는 얼굴로 못난 그들을 간단하고도 간편하게 살짝 즈려 밟아준다. 하지만 그들은 쉬이 일어나지 못할만큼 자존감을 잃어버린다.
3. 찐따와 찐따 애인, 그 둘이 뭉치다.
그런 불쌍한 그들이 우연찮게 뭉친다. 양미숙과 서종희는 각자 다른 생각을 하지만 같은 목표를 향해 돌진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싹트는 둘 간의 끈끈한 정은 이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정서이다. 압권은 마지막, 서종희의 엄마인 사모님이 등장했을 때. 양미숙은 서종희의 손을 부여잡고 엉엉 울면서 사실을 고백한다. 그 티코에서 선생님과 자기는 진심이었다고. 하지만 서종희는 이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를 듣고 오로지 양미숙을 위해 거짓말을 한다. “아빠 나빠!”
둘은 원래 그렇게까지 서로를 위하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서종희는 오로지 부모님의 이혼을 막기 위해, 양미숙은 오로지 자신의 사랑을 위해서 서 선생의 이혼을 막으려고 고군분투했다. 이기적이었던 그들의 관계는, 매일 밤 채팅을 위해 함께 둘러앉아 간식을 나눠먹고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고도를 기다리며’ 연습을 하면서 서서히 자매애로 모습을 탈바꿈하기 시작한다. 자매애라는게 뭐 그리 거창한 것이더냐. 여자들간의 남다른 우정, 그것의 진한 표현이 자매애 아닐까.
선생님과 학생 간, 전혀 가능할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그 둘 간의 관계가 친밀해지는 유쾌한 전복을, 영화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버린다. 그리고 전교생이 찐따와 찐따 애인이라며 그 둘을 비웃을 때, 그들은 기존의 견고한 장벽을 그들만의 몸짓으로 가뿐히 뛰어넘는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며 ‘고도를 기다리며’의 대사를 차례로 읖조리는 그들은 공연을 하는 내내 그 어느 때보다도 활짝 웃는다. 쓰레기와 야유를 온몸에 받으면서도, 밀가루를 흠뻑 뒤집어쓰고 하나밖에 없는 가방이 엉망이 되었어도 그들이 깔깔거리며 웃는 장면은 서로가 서로에게 새로운 존재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준다. 사회부적응자인 왕따 둘이 우정을 확인하는 이 유쾌한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박수를 치고 싶고 슬며시 미소가 지어질 수 밖에 없다.
공효진은 여기서 발군의 연기력은 과시한다. 그녀는 양미숙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캐릭터를 빨간 얼굴로 뚝심 있게 소화해낸다. 별 주목을 받지 못한 것 같지만, 공효진의 상대역인 서우 역시 공효진에게 밀리지 않는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미쓰 홍당무>가 보여주는 질투와 그에 기반한 과대망상, 온갖 치졸함들은 과장되었을지언정 생생하다. 그리고 너무 생생해서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양미숙은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다. 삽질을 하고 울부짖으며, 자신의 부족함을 알면서도 당당할 수 있는 양미숙, '니가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