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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의 좁고 몽롱한 자취방에서 밥을 먹으며 말 없이 TV를 보고, 다리를 포갠 채 낮잠을 자기도 했다. 새벽에 악몽을 꾸다 깨면, 꿈이니까 괜찮다며 다독여주는 사람이 옆에 있었다. 어느 일요일에는 햇살에 살짝 찌뿌린 미간으로 슬리퍼를 끌며 놀이터 앞 공터에서 열리는 장 구경을 가서는 옥수수며 떡이며 뻥튀기를 한 아름 사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나는 그에게 시를 써주고 그는 내게 요리를 해주면서,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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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냈거나 배껴왔거나 혹은 회상하는, 연인이었던 두 사람의 주말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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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일부분을 조심스레 꺼내보다 생각했다. 우주 어디에도 없을 것 같던 우리의 이야기는 잠시만 실눈을 뜨고 둘러보면 여기저기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나를 돌아봤다. 원래 이런 거 몰랐냐는 표정으로. 난 몰랐었다. 사는 게 다 그렇지, 하는 무력한 체념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그러니까 너무 절망할 것도 없다고 담담하게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을. 고유하지만 보편적일 수 있다는 것은 실망이면서 동시에 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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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또다시 사랑을 시작해도 될까?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아마 우리는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허무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이에게 그런 말은 공허할 뿐. <비기너스>는 ‘38살씩이나 되어서 다시 여자에게 빠진’ 올리버의 이런 회의로 시작한다. 올리버의 그 마음은 29살 밖에 되지 않은 나의 마음과 같다. 우리가 맺어온 관계들의 양상과 기간과 이별의 이유는 다르겠지만, 그 과정을 통과하면서 다다른 결론만은 비슷하기 때문이다.
올리버가 가진 관계의 원형은 게이인 아버지와 게이인 것을 알고도 결혼한 어머니로부터 비롯된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는 아들에게 “난 게이다. 한평생 너의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이젠 이쪽으로 나의 성향을 펼쳐보고 싶구나” 라는 고백을 한다. 올리버는 덤덤하게 아버지를 받아들이고 아버지의 젊은 연인을 지지해주지만, 수시로 떠올린다. 어렷을 적 아침마다 관성적으로 어머니에게 뽀뽀했던 아버지의 모습과 쓸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어머니의 얼굴을.
카메라는 어린 올리버의 시선에서 바라본 그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관객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올리버가 살아가면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는 인생의 스틸컷 같은 것이라고. 누구에게나 있다. 관계의 원형, 그리고 뇌리에 각인된 장면. 그 스틸컷은 정지해있지 않고 끊임없이 재생되면서 숱한 의문의 실타래와 고통스러운 질문들을 뽑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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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드 분장을 하고 가장 무도회에 간 어느 날, 올리버는 애나를 만난다. 애나는 올리버처럼 가족으로부터 파생된 괴로운 관계적 원형을 품고 있다. 애나는 자신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어 자살하고 싶다고 호소하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악몽을 품고 있다. 그녀는 어느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모든 연인을 떠나왔다. 가짜 프로이드 박사는 후두염에 걸려 말을 하지 않는 환자와 무도회장을 빠져나온다. 그들의 옆에는 아버지의 반려견이었던 개 ‘아서’가 있다. 인간의 단어 150개를 알아듣지만 말을 하지 못하는 아서는 말한다. “그녀는 달라요."
하지만 올리버는 특별한 그녀와도, 습관처럼 굳어진 오래된 관계의 패턴을 쉽게 깨지는 못한다. 올리버와 애니는 서로에게 가까워지면서 각자가 가진 트라우마를 마주한다. 타인과 친밀해질수록 자신의 상처와도 근접해지는 것이 관계가 가진 숙명적인 아이러니. 그리고 마주할지, 외면할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온다. 결정적인 그 문턱을 넘어 진정으로 서로를 껴안을지, 아니면 지금까지 그래왔듯 회피하는 길을 택할지. 그 둘이 내딛는 발걸음의 방향은 이 영화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영화가 지지하는 어떤 선택을 보면서, 시작의 기로에서 망설이는 이들이 깊은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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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를 우울에 침잠하게 만든 상처들은 결국은 애나와의 성장을 위한 자양분이 되었다. 일러스트레이터인 그가 그리는 부모님의 이야기는 ‘슬픔의 역사’가 분명하다. 하지만 영화는 아내와 아들을 둔 동성애자의 비극적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성애자 아들이 만들어가는 사랑의 역사와 이를 연결시킨다. 그래서 아버지 할의 이야기는 올리버의 상처를 설명하기 위한 곁다리로써만 존재하는게 아니라, 전체적인 서사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움직인다.
할은 원하는 사람과 마음껏 사랑을 하고 살지 못했던 비운의 인물, 역사적 맥락에서는 ‘특수한 자’일지라도, 커밍아웃 이후의 행보를 통해 관계라는 맥락에서는 사랑을 하는 ‘보편적인 자’로 비추어진다. 오히려 할은 올리버에게 어째서 너는 사랑을 하지 않느냐고, 왜 그렇게 마음을 닫고 있느냐고 묻는다. 할은 병상에 누워서도 멋진 청년에게 머리를 만져달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일까. “끝까지 열정을 놓지 않으셨군.”이라는 애나의 대사가 할에게 보내는 감독의 찬사처럼 느껴지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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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길버트라는 심리학자는 인간의 뇌는 미래를 상상할 수 있지만 그 능력이 완벽하지 못해서, 현실을 경험할 때와 같은 감각기관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를 떠올릴 때, 현재의 느낌에 제한받을 수밖에 없단다. 어느 책에서 이 부분을 읽고 고개를 끄덕인 기억이 난다. 우리는 전과 같은 불행이 다시 닥칠 거라고, 파국이 되풀이될 거라고, 혼잣말을 하면서 과거에 짓눌린 현재의 감정들로 나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가능성들을 막아버리기 일쑤니까.
말미에 영화는 부드럽게 속삭인다. 언제가 되든지, 사랑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갈 자격은 아직 충분하다고. 미리 미래를 검게 칠하지는 말자고. 어차피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지 않느냐고. 그리고 나는 파스칼 키냐르의 말을 떠올린다. "삶에서 중요한 ㅡ 삶의 활기를 북돋우는 ㅡ 유일한 순간들에는, 끊임없이 스스로에 덧붙여지는 최초의 단계가 있을 뿐이다.
<비기너스>를 본 후, 봄이 오려는 듯 꼬물거리는 햇살 사이로 발을 내딛고 싶어지는 게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