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아시아 단편경선'
20세기 초, 의심의 여지 없이 안정적인 경제력을 보장해줄 중매결혼 대신 독신을 택하고 평생 스스로를 먹여살렸던 그녀들이 이제는 요양원에서 나이 들어 굽은 허리로 남자 없이 살았던 지나간 삶을 담담히 이야기한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오롯이 홀로 꾸려온 삶이 만들었을 굳은 흔적들과 그 삶을 통해 다져졌을 단단한 자부심이 묻어난다.
그 당시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일이었던 남자와의 결혼을 통해서만 올릴 수 있는 머리를, 스스로 틀어올렸던(이를 '자소自梳'라고 한단다) '비혼' 여성들. "남자와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 라며 부드럽게 고개를 젓던,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살았던 어떤 중국인 여성 노인을 떠올리면서, 남들 다 '하는' 것을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이토록 정치적이고도 실존적인 행위에 대해서 곱씹어본다.
20세기 초, 의심의 여지 없이 안정적인 경제력을 보장해줄 중매결혼 대신 독신을 택하고 평생 스스로를 먹여살렸던 그녀들이 이제는 요양원에서 나이 들어 굽은 허리로 남자 없이 살았던 지나간 삶을 담담히 이야기한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오롯이 홀로 꾸려온 삶이 만들었을 굳은 흔적들과 그 삶을 통해 다져졌을 단단한 자부심이 묻어난다.
그 당시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일이었던 남자와의 결혼을 통해서만 올릴 수 있는 머리를, 스스로 틀어올렸던(이를 '자소自梳'라고 한단다) '비혼' 여성들. "남자와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 라며 부드럽게 고개를 젓던,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살았던 어떤 중국인 여성 노인을 떠올리면서, 남들 다 '하는' 것을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이토록 정치적이고도 실존적인 행위에 대해서 곱씹어본다.
어제 이 글을 쓰고 난 후 오늘 아침 보게 된 인권오름에서 접한 시의적절한 글.
[몽의 인권이야기] 그래, 비혼은 라이프스타일 ‘정치’다!
비혼운동을 하면서 인터뷰를 하다보면 종종 나에게 던져진 질문들에서 인터뷰어 혹은 이 사회가 비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어떤 ‘혐의’들을 느낄 때가 있다. ‘세상은 자기가 좋은 대로만,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는 없지 않나요?’ 그럴 때마다 나는 비혼 여성들의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목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이야기되기도 전에, 결국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겠다는 개별적인 여성들의 자기주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인가 싶어 못내 씁쓸하다. 그러다 쓰인 지 꽤 시간이 흐른 ‘이’ 문제적인 글을 최근에서야 읽게 되었다.
… 나는 생경한 단어를 만들어내는 것 자체를 비판하지 않았다. 나는 생경한 단어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쓰지 않는 사람들을 ‘성 차별’로 비판하는 것이 과도함을 지적했다. 결혼제도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비혼’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미혼’이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는 주장은 지나친 얘기다(그러나 ‘미혼모’라는 표현은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은 여성에 대한 편견을 담고 있고, ‘한부모’라는 더 나은 표현이 있으므로 사용하지 않는 게 좋다). … 게다가 ‘비혼’은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의 정치(라이프스타일 정치)를 드러내기 위해 선호하는 표현이다(결혼을 ‘못’한 게 아니라 ‘안’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개인의 삶 방식 변화를 통해서 여성 해방을 이룬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비혼’이라는 용어 사용을 충분히 꺼릴 수 있다.
- 정진희, 레프트21, ‘페미니즘 언어와 정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2010년 07월 17일
한동안 ‘분노’를 참기 어려워 방방 뛰었다. 이 기사의 필자가 보여주는 ‘순진함’만큼 비혼으로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스스로에게 던지는 끊임없는 의문과 질문, 늘 따라오는 ‘정상적’인 삶에 대한 열망이 아무런 갈등 없이 설명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신의 세상은 참 단순해서 좋겠다고 웃어넘기려고도 해 봤지만, 나는 ‘비혼은 라이프스타일 정치’라는 정의의 ‘말씀’ 안에서, 그리고 그 밖에서도 소리 없이 사라지고 싶지 않다.
[그림: 윤필]
‘라이프스타일 정치’라는 말
이 글에서처럼 비혼이라는 말이 라이프스타일 정치, 즉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서의 삶의 양식를 드러내고 추구하기 위해 ‘선호’되는 것라면, 한국 사회를 향한 비혼 여성들의 목소리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나는 비혼을 라이프스타일 정치로 규정하고 해석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비혼 여성들을 ‘할당’으로서 위치시키는 효과를 낳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자신을 미혼(언젠가 결혼을 할 수도 있지만, 현재 결혼을 안 한 상태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자신을 비혼으로 ‘증명’해내야 하는 여성들이라면 너무나 익숙한 말일 것이다. 내가 왜 미혼이 아닌 비혼인지를 이야기할 때 한결같이 상대에게서 나오는 반응이다. 실제로 결혼을 “안”하는 여성도 있고 결혼을 “못”한 여성도 있다, 비혼이라고 하지 않는다고 해서 꼭 틀린 것은 아니라는 반응이다. 이러한 말들은 너무나 쉽게 비혼을 그저 ‘서로 다른 삶의 형태’ 중 하나인 것으로 간주한다. 결혼이 정상이기는 하지만 결혼하지 않는 여성들‘도’ 있다는 여백에 대한 주장? 비혼 여성들의 목소리는 그러한 여백의 공간을 요구하는 할당제를 위한 요청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목소리는 대체로 기혼이거나 미혼인 ‘여성’들에게 요구하는 목소리로 여겨진다.)
미혼이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 써도 된다, 맞다 틀리다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할당’된 존재, 라이프스타일로서 규정된 순간 비혼 여성들은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문제제기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인식체계를 주장하기보다, 기존의 체계와 존재들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점을 ‘자진해서’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그래야 안전하게 가족제도 안에서 ‘라이프스타일’로라도 존재할 수 있으니까). 나는 이처럼 비혼과 같은 젠더 문제가 논의되는 방식 자체가 이미 결혼제도를 공고히 하는, 그것으로 이익을 얻는 남성중심적 사유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짜이기 쉽다는 증거로 읽힌다. 그 인식틀에 대한 문제제기에 귀 기울이지 않은 채 용어의 사용에 O, X를 매기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
진짜 문제?
비혼이 ‘스타일’로 해석될 때 내가 분노하고 절망하는 이유는 이렇게도 살 수 있다고 ‘할당된’ 비혼 여성들의 위치와 행위성이 제기하는 첨예한 정치적 문제를 희석시키고 희화화하기 때문이다. 비혼을 비롯해서 사회적 소수자들이 그렇게 외치는 ‘다르게 살고 싶다’의 ‘다르게’는 그저 지루한 남들의 인생과는 달리 특별하게, 독특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인가? “진짜 문제”는 비혼이 라이프스타일 정치인 것이 아니라, 어떤 라이프스타일들이 특권적인 라이프스타일과 ‘어떻게’ 다른지를 논의할 수조차 없는 우리사회의 가부장적 전체주의다.
‘모든 사람이 군대에 가야한다’, ‘모든 사람은 이성과 사랑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정상적인 몸을 가져야 한다’ … 이런 요구들을 우리는 파시즘의 폭력이라고 부른다. 미혼(未婚),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는 말에는 이미 모든 사람은 결혼을 해야 하고 또 하고 싶어해야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건 누구의 전제인가? 모두가 결혼해야 한다니, 이처럼 비가시적이면서도 강력한 폭력이 어디 있나.
비혼(非婚)은 단순히 미혼에 대한 대응항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결혼해야 한다’는 전제(이 말은 사실 ‘모든 여성은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한다’는 전제다)를 깨뜨리는 비혼은 한국 사회에서 가부장제와 정상가족중심주의의 유지가 여성의 존재를 어떤 방식으로 통제하고 규정함으로써 가능했는지 질문을 던진다. 우리 사회가 남성과 달리 여성에게 ‘어머니’, ‘아내’, ‘딸’ 이외의 정체성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어떻게 ‘시민’의 권리에서 여성을 제외시켰는지, 가사/출산/양육 등 가족유지의 책임을 전담시키면서 동시에 노동권을 어떻게 박탈시키는지, 그래서 누가 이익을 얻고 있고 무엇이 유지되고 있는지를 문제 삼는다.
사회가 비혼을 ‘불안한 삶’이라 낙인찍고 비혼 여성들 스스로도 비혼으로서 자신의 삶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기 어렵다 토로하는 것은 그만큼 여성에게 혼(婚)의 여부가 정체성과 삶을 구성하는 너무나 강력한 중심축이자 기준이라는 사실, 기존의 결혼/가족을 중심으로 한 여성의 생애주기에서 벗어난 삶의 모델을 기획하기가 어렵다는 증거다.
나는 위 기사의 필자가 이미 스스로 비혼의 정치학에 대한 모순된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혼모’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에서 특정한 여성에 대한 편견을 전제한 말로 통용되는 이유는 단순히 ‘모(母)’라는 단어가 붙었기 때문이 아니다. -저출산 위기를 들먹이는 요즘 같은 시대에 ‘엄마’는 오히려 칭찬받고 환영받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성애 결혼제도와 정상가족 내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여성의 재생산권 실천, 남성 가부장의 승인 없는 아이를 낳음으로서 ‘모’가 되고자 하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 비난이 가능한 이유는 너무나 명백하지 않나? 여성이 결혼/가족제도를 경유하지 않고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여성의 삶이 결혼제도, 가족중심주의를 지탱하고 실천하는 공간 그 자체일 때, 여성이 자신은 다른 존재일 수 있다고 외치는 목소리, 다른 삶을 기획하고 싶다는 목소리를 내는 행위는 그 자체로 얼마나 위협적인가. 지긋지긋한 남성 사유의 역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벗어나겠다는 절박한 목소리.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런 목소리들에 어떤 시선을 보내고 있는 걸까. 위의 기사를 읽는 순간, ‘비혼 여성들의 존재 자체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 우리 사회에는 없다’는 여성학자 전희경의 말을 다시금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비혼의 정치학은 차별적인 성별/가족/결혼제도에 반대하는 ‘정치적 올바름’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실 비혼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결혼 적령기’의 여성들에게 ‘대안’으로서 기대를 받는 것은, 그것이 불안하지 않고 안정된 삶, 더 가치 있는 삶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장밋빛 희망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기존에 사회적으로 승인되는 관계맺기의 방식과 자신에게 요구되는 ‘여성됨’을 통해서는 자신의 앞에 펼쳐진, 살아내야 하는 갈등과 딜레마를 설명하고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비혼을 ‘라이프스타일 정치’라고 설명해낼 수 있는 갈등 없는 삶보다,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고 사회에서 경계 짓는 정의와 역할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정상적인 삶에 대한 욕망과 ‘나 답게’ 살고 싶다는 열망 사이에서 기대와 협상과 좌절을 거듭하는, 그래서 한국 사회가 가진 ‘관계의 위기’를 자신의 존재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내며 ‘다르게’ 살아가고자 고군분투하는 여성들의 삶이야말로, 무엇이 ‘정치적’인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 이 글은 언니네트워크에서 진행한 열린강좌 <비혼 제너레이션을 말하다>의 전희경, 전은정, 박선영 님의 강좌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몽 님은 언니네트워크(www.unninetwork.net)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248 호 [기사입력] 2011년 04월 26일 14:56:18
* 강조는 낙타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