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못한 곳에서 발견한 감동은 특히 더욱 가슴을 벅차게 한다. 하마터면 놓칠 뻔한 <마루 밑 아리에티>를 Y의 추천으로 챙겨본 후, 건조하게 말라버린 내면 어딘가에 단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영화에서 줄곧 나오던 보슬비처럼.
어렸을 적 'The borrowers' 라는 동화책을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 때는 그저 숲속을 날아다니는 신비한 요정쯤으로만 느껴졌던 것 같은데 아리에티를 통해 '요정'들은 구체적인 형상을 지닌 존재인 '소인'으로 내 앞에 다가왔다. 소인의 눈을 통해 바라본 인간의 세계는 거대하고 거칠고 불친절한 곳이었다. 물론 다른 이들이 지적한 것처럼 인간이라는 단어는 주류, 다수 종족, 이성애자 등으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나는 또 다시 '시선'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들을 좀도둑으로 보는 중년 여성이 아리에티의 엄마를 잡아서 유리병에 가두고 쥐 잡는 업체를 불렀던 것처럼, 그들을 친구로 보는 쇼우가 엄마를 구하려는 아리에티를 돕고 그들의 존재를 비밀로 하는 것처럼, 시선은 행동을 결정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보게되는 많은 일들처럼 그 행동들로 인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이 결정된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했다. 왜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하는걸까. 역사가 숱하게 증명했듯, 모든 불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하는 누군가의 혹은 그들의 혹은 우리의 오만이 무수한 비극을 싹트게 한다. 강물이 흐르게 내버려두지 못하고, 동성을 사랑하는 걸 두고 보지 못하고, 오랫동안 살던 터전에서 내쫓고, 그냥 그렇게 그 자리에서 숨쉬고 살아가는 생명들을 건드린다. 인간들이 나무에서 과일을 따듯, 소인들 역시 인간들이 자연에서 빌린 것들을 인간에게서 빌리고 있을 뿐인데 그것을 '훔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이야말로 자연에 대한 가장 큰 약탈자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주제들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품는다. 한 시간 반 동안 아리에티를 따라가다보면 평소에는 도저히 체험할 수 없는 '마루 밑'의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지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온갖 은유와 상징들을 흡수하게 된다. 인간인 관객에게 최대한 소인들의 시선으로 인간 세계를 경험하게 하기 위한 의도인건지, Y가 비슷하게 언급한 대로 인간 세계의 스케일에 대한 묘사는 특히 뛰어나다. 각설탕과 휴지를 '빌리러'가는 아리에티 부녀가 벽을 붙잡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꽤 오래동안 비추고, 각설탕을 향해 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흡사 히말라야를 등정하는 산악영화의 느낌마저 준다. 이러한 몇 장면만 자세히 봐도,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엄청나게 힘들고 불편한 것임을 느끼게 된다.
쇼우의 처연한 눈망울은 조동진의 노래 '제비꽃'을 떠오르게 한다. 심장이 약해 주로 침대에서 보내야하는 병약한 소년과 그를 찾아온 건강하게 뛰어다니는 생명력 넘치는 아리에티. 그 둘의 만남이 빚어내는 정서는 '제비꽃'의 그것을 닮았다.
"내가 처음 너를 만났을 때 너는 작은 소녀였고 머리엔 제비꽃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멀리 새처럼 날으고 싶어. 내가 다시 너를 만났을 때 너는 많이 야위었고 이마엔 땀방울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와, 내가 마지막 너를 보았을 때 너는 아주 평화롭고 창너머 먼 눈길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한밤중에도 깨어있고 싶어."
쇼우와 아리에티의 관계는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해서 가져야하는 태도에 대해 애틋하게 보여주는 듯 하다. 진정 사랑한다면 우리는 상대를, 다른 생명을,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할까? 아리에티 가족을 위해 부엌을 선물하는 쇼우는 사실 그로 인해 그들의 천장을 부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도 알게 되지 않았을까. 존재에 대해 진정 애정을 가졌다면, 그들이 그들 모습 그대로 살게 해줘야한다는 것을. 영화 <레옹>에서 마틸다는 화분을 들고 다니는 레옹에게 말한다. 그 식물을 진정 사랑한다면 들고 다니는게 아니라 땅에 심어줘야한다고. 비록 둘은 마음 아픈 이별을 했지만, 조동진의 '제비꽃'에서 '내'가 '너'를 기억하는 것처럼 마음으로 계속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쇼우는 아리에티에게 말한다. "너는 내 심장의 일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