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가 픽사 없이 야심차게 내놓은 기대작, 볼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페니에 대한 충성과 사랑을 저버리지 않았듯이, <볼트>는 관객에게도 묵묵히 최선을 다한다. 드라마에서 페니를 악당으로부터 구하는 역할을 해온 볼트는 자신이 진짜 슈퍼독(superdog)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세트장을 뛰쳐나와 길을 잃게 된 볼트는 다시 페니에게로 향하는 긴 여정을 떠난다. 여기에 고양이와 햄스터까지 합세해 셋이서 함께하는 로드무비가 되었다.
이를테면 이 애니메이션은 스타 강아지의 ‘자아 찾기’다. 현실과 괴리된 세트장에서만 살던 볼트는 바깥세상에서 비로소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엄청난 초능력이 진짜가 아니었음을 깨닫고 혼란에 빠진다. 주위의 사람들은 드라마를 위해 볼트에게는 이 모든 것이 가공된 것임을 말하지 않았었다. 일종의 강아지판 트루먼쇼인 셈이다.
하지만 조금만 확대해석해본다면 <볼트>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반려견들은 가공의 세계에서 사는 것이 아닐까. 잠깐의 산책이 아니라면 집안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주어진 음식을 먹고 정해진 삶을 사는 것이니까. 모든 반려견들은 볼트의 착각과 같은 상태에서 평생을 사는지도 모른다.
<볼트>가 <트루먼쇼>가 될 수 없는 점은 결말 때문이다. 트루먼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지만, 볼트는 ‘애완견’ 답게 페니에게로 되돌아간다. 이는 역시 동물들이 주인공인 애니메이션 <마다가스카>에서 그들이 시도하는 탈출과 대비된다. <볼트>는 넓은 세계로의 해방이 아니라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귀향으로 마무리 되는 것이다. 무릇 강아지는 주인 곁에 머물도록 길들여진 법. 이는 디즈니의 보수성을 슬쩍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관객은 볼트와 페니의 드라마를 시청하는 비둘기와 햄스터,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우리들, 이렇게 둘이다. 온갖 매체에서 볼트를 지켜보아온 비둘기들과 햄스터는 TV에서 본 볼트를 알아보고 경탄을 하고 볼트를 보는 나 역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볼트 캐릭터를 만든 사람이 밝혔듯이, 제작자는 볼트의 동작 하나하나를 뛰어나게 재현했다. 미세한 털의 휘날림이나 눈동자의 움직임은 볼트를 실제 강아지처럼 느껴지게 한다.
우리 착한 강아지 볼트, 놀랍도록 귀엽고 사랑스러운 강아지를 보는 즐거움을 선사한 이 애니메이션은 디즈니의 자존심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음이 분명하다.